전체 글44 플로리다 프로젝트 (핸드헬드, 네오리얼리즘, 아역연기) 비전문 배우를 인스타그램에서 캐스팅해 3주 만에 현장에 투입한 영화가 있습니다. 브리아 비나이트, 1993년생. 그가 연기한 무니 엄마 핼리는 그 짧은 준비 기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날것 그대로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제가 느낀 감정은 감탄보다 당혹감에 가까웠습니다. 이게 연기인가,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인가 하는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거든요.핸드헬드 촬영과 네오리얼리즘이 만든 질감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촬영 방식부터 남다릅니다. 션 베이커 감독은 전작들을 아이폰으로 찍은 감독입니다. 이번 작품 역시 마지막 엔딩 시퀀스는 아이폰으로 촬영했는데, 이게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디즈니 월드 촬영 허가가 나오지 않아 몰래 아이폰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제약이 결과적으로.. 2026. 6. 4. 킬링 디어 (불편함, 카타르시스, 희생양)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나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킬링 디어를 본 날 밤, 진짜로 그랬습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불쾌한 감정을 남기는 영화는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불쾌함이 오래 남았고, 결국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불편함이 설계된 영화라는 것킬링 디어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7년 작품입니다.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 방식이 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데,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배우, 조명, 소품, 공간 구성 등 모든 시각 요소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개념입니다. 킬링 디어에서는 이 미장센이 유독 차갑고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어딘가 인공적이고 낯선 느낌을 줍니다.저도 처음엔 그냥 "이상한 영화"라고만 느꼈는데, 씬 하나하나.. 2026. 6. 3. 영화 로건 리뷰 (노쇠한 영웅, 로드 무비, 휴 잭맨) 휴 잭맨이 17년간 연기한 울버린의 마지막 독립 영화, 로건은 로튼 토마토 관객 점수 93%에 전 세계 흥행 수익 6억 달러를 넘긴 작품입니다. 울버린 팬이었음에도 사정이 생겨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지 못했고, 이번에 제대로 각 잡고 봤는데 마지막에 눈물을 질질 짰습니다. 왜 이렇게 슬픈 영화인지, 어떻게 봐야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지 풀어보겠습니다.노쇠한 영웅: 기존 히어로 영화와 완전히 다른 출발점히어로 영화를 고를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예전 시리즈 분위기 그대로겠지"라는 기대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로건은 시작부터 그 기대를 보기 좋게 짓밟습니다.이전 엑스맨 시리즈에서 울버린은 언제나 여유 넘치는 나쁜 남자 포스였습니다. 치유 능력, 즉 힐링 팩터(Healing Fa.. 2026. 6. 3. 히든 피겨스 (실화, 인종차별, 리더십) 흑인 인권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고 나니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1960년대 NASA를 배경으로 한 세 흑인 여성의 실화. 저는 이 영화가 그냥 차별 고발물일 거라 짐작하며 앉았는데, 두 시간 뒤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아무것도 모르고 봤더니 오히려 좋았습니다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관련 정보를 하나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제목과 포스터만 봤고, 흑인 여성들이 나오니 인권 관련 이야기겠거니 했을 뿐입니다. 배경이 NASA라는 것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도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그게 오히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습 없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하나하나 새롭게 다가왔고, 그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에 자연.. 2026. 6. 2. 그린북 (비고 모르텐슨, 편견, 우정) 봐야지 봐야지 하며 계속 타이밍을 놓치다가 얼마 전에 겨우 봤습니다. 솔직히 '60년대 인종차별 + 흑백 콤비 우정' 이 조합이면 결말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서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예상은 맞았는데, 그래도 좋았습니다.비고 모르텐슨이라고 몰라볼 뻔했습니다일반적으로 비고 모르텐슨 하면 아라곤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인데,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 기억이 거의 지워졌습니다. 살까지 찌워서 나오니 포스터를 안 봤다면 다른 배우인 줄 알았을 것 같습니다.캐릭터 자체도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말빨만 좋고 주먹부터 내세우는 허풍쟁이처럼 보이는데, 보다 보면 가족한테는 정성을 다하고 상황 판단도 빠르고 나름 의리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먼치킨형 캐릭터인가 했.. 2026. 6. 2. 태풍이 지나가고 리뷰 (연기, 고레에다, 여운)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까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기작들을 워낙 높게 쳐두고 있던 터라, 최근 작품들은 조금 평이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트나인 스크린 앞에 앉아서 영화가 끝났을 때, 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교외 연립주택단지, 그리고 태풍이 만들어낸 정서혹시 어린 시절에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을 기억하십니까? 전날까지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과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세상 전체가 쓸려나간 듯 조용해지던 그 적막감 말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감각을 스크린 위에 옮겨놓으려 한 작품입니다.고레에다 감독은 아홉 살부터 20년간 살았던 실제 연립주택단지를 직접 찾아가 촬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026. 6. 1. 이전 1 2 3 4 5 6 ··· 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