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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금융위기로 증발한 자산은 약 11조 달러, 우리 돈으로 1경 원이 넘습니다. 이 숫자를 처음 마주쳤을 때 솔직히 실감이 안 났습니다. 영화 <빅쇼트>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숫자 뒤에 어떤 인간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 많은 개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실제로 이게 얼마나 황당한 구조였냐면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란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주택담보대출을 말합니다. 여기서 '서브프라임'이란 말 그대로 '우량 이하', 즉 일반적인 기준에서 대출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정상적인 금융 시스템이라면 애초에 걸러졌어야 할 대출들이 줄줄이 통과된 것이죠.
영화에서 마크 바움 팀이 직접 발로 뛰며 확인한 현장이 이 황당함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스트립 클럽에서 춤을 추는 여성이 주택 다섯 채에 콘도 한 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직업은 스트리퍼였습니다. 대출 심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마크 바움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장면은 코미디 같지만 실화입니다. 저도 이 장면을 보면서 "설마 이게 진짜였다고?" 싶어서 잠깐 멈추고 되감았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출 관행은 이른바 닌자(NINJA) 대출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준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NINJA란 No Income, No Job, No Asset의 약자로, 수입도 없고 직업도 없고 재산도 없어도 대출을 내준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반려견 이름으로 대출을 받은 사례까지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은행은 대출 심사를 철저히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 미국 금융권의 실태는 완전히 정반대였던 겁니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 신용 불량자에게 제공하는 고위험 주택담보대출
- NINJA 대출: 수입·직업·자산 없이도 대출 승인이 나던 당시 관행
- 고정금리 혜택 종료 시점(2007년 2분기)이 폭탄의 뇌관이었음
공매도와 신용부도스왑, 마이클 버리는 왜 혼자만 보였을까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마이클 버리는 의사 출신으로 헤지펀드에 합류한 실존 인물입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공매도(Short Selling)였는데, 공매도란 자산의 가격이 내려갈 것을 예상하고 미리 빌려서 팔아놓은 뒤 가격이 떨어지면 싸게 사서 갚아 차익을 버는 전략입니다. 쉽게 말해 '망할 것에 돈을 거는' 행위입니다.
더 정확히는 신용부도스왑(CDS, Credit Default Swap)을 매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CDS란 채무자가 빚을 못 갚을 경우를 대비해 구입하는 일종의 보험 상품으로, 대출이 부실화될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버리는 주택 시장이 붕괴하면 이 CDS 가치가 폭등할 것이라고 봤고, 골드만삭스를 찾아가 거래를 성사시킵니다. 골드만삭스 직원들이 그가 나가자마자 비웃는 장면은 지금 보면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였습니다. 메소드 연기로 유명한 배우답게 마이클 버리의 편집증적인 집중력과 사회적 어색함을 섬세하게 표현했는데, 보다 보면 이게 연기인지 실제 인물의 재현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연방준비제도(Fed)의 그린스펀 의장이 "주택 시장은 안정적"이라고 공언하던 시점에 혼자 수백 장의 모기지 서류를 뒤지고 있던 버리의 모습은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CDO와 합성 CDO, 거품이 거품을 먹고 자란 구조
영화에서 가장 힘을 쏟은 설명 중 하나가 CDO(부채담보부증권,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입니다. CDO란 여러 종류의 대출채권을 한데 묶어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만든 것인데, 문제는 이 안에 부실 채권이 섞여 있어도 겉으로는 신용등급 트리플 A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앤서니 부르댕의 '해물 스튜' 비유가 이걸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상하기 직전의 B급 해물을 신선한 재료와 섞어 끓이면, 소비자는 그게 B급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거죠.
더 나아가 합성 CDO(Synthetic CDO)라는 것도 등장합니다. 셀레나 고메즈가 카지노 블랙잭 테이블에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 사람이 패에 돈을 걸면 다른 사람이 그 결과에 또 돈을 걸고, 그 돈에 또 다른 돈이 붙는 방식입니다. 실물 자산 없이 베팅 위에 베팅이 쌓이는 구조라서, 거품이 꺼질 때 충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 당시 CDO 시장 규모는 수조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비슷한 서브프라임 사태를 다룬 영화들이 주로 복수극 구조로만 사태를 풀어나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돈이 오가고 무언가 무너지는 가시적인 장면에 집중하면서 정작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는 흐릿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빅쇼트>는 애초에 사태의 내막을 전달하겠다는 의도가 뚜렷하고, 그 때문에 카메오들을 동원해서까지 개념 설명에 공을 들입니다. 처음 마고 로비가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하면서 서브프라임을 설명하는 장면은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오마주가 분명한데, 그 유머 감각이 지루해질 수 있는 개념 설명을 살려냅니다.
- CDO: 부실 채권을 우량 채권과 묶어 트리플 A 등급으로 포장한 금융상품
- 합성 CDO: CDO 자체를 기초자산으로 삼아 또 다른 파생상품을 만든 구조
- 신용평가사의 묵인: 실질 위험을 알면서도 트리플 A 등급을 유지한 공모 관계
연출 방식과 배우들, 오락성과 시사성을 동시에 잡은 방법
아담 맥케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제4의 벽 허물기, 빠른 교차편집, 쉬지 않고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조합합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질감을 주면서도 극영화의 서사를 유지하는 방식인데, 저는 이걸 '마틴 스콜세지 스타일의 의도적 계승'이라고 봤습니다. 실제로 감독 본인도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의 영향을 인정한 바 있고, 영화 초반 마고 로비의 등장은 그 오마주를 공공연히 드러냅니다.
배우들 면면도 각자 역할에 딱 맞습니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중개인 캐릭터는 얄밉고 능글맞은데 그 연기가 의외로 재미있고, 브래드 피트가 맡은 벤 리커트는 수익을 앞에 두고 "이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고 일갈하는 장면에서 영화 전체의 도덕적 무게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배우는 스티브 카렐이었습니다. 폭스캐처에 이어 또 한 번 기대를 넘어서는 연기를 보여줬는데, 자세히 보면 <오피스>의 마이클 스캇 특유의 발성과 리듬이 캐릭터에 교묘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코미디 출신 배우가 이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단순히 오락성으로만 접근한다면 이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습니다. 금융 용어가 쉬지 않고 쏟아지고, 설명을 위한 멈춤이 반복되다 보면 리듬이 끊기는 구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그 단점을 알면서도 '사태의 내막을 전달하겠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삽니다. 출처: IMDb에 따르면 <빅쇼트>는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했고, 그 평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 핸드헬드 카메라와 제4의 벽 허물기로 다큐멘터리 질감 구현
- 카메오(마고 로비, 셀레나 고메즈, 앤서니 부르댕)를 활용한 전문 용어 해설
- 스티브 카렐, 크리스찬 베일, 라이언 고슬링, 브래드 피트의 앙상블이 균형감을 만들어냄
영화가 끝날 때 주인공들은 돈을 법니다. 하지만 뒷맛은 씁쓸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브래드 피트의 대사였습니다. 춤을 추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실업률이 1% 오를 때마다 4만 명이 죽는다"고 말하는 그 장면.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잊는 순간, 시장은 괴물이 됩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2008년 미국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동산에서 상처를 받은 서민들이 주식시장으로 몰려들고,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이 퍼질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경고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서브프라임도, 동학개미운동도, 구조는 달라도 그 심리는 닮아 있습니다. 금융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만 보지 마시고, 한 번쯤은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lgNUNE0olk&list=PLzMlWTOO8JND1pjgph7yiCPtgUdJ9EOOi&index=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