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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게임 이후 마블이 내놓은 작품 중 손에 꼽을 만한 완성도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저도 멀티버스 사가가 시작되고 나서 몇 번 크게 실망한 뒤로 극장을 잘 안 가게 됐는데, 이번 썬더볼츠는 오랜만에 밤 늦게까지 머릿속에 남는 영화였습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잘 만들었다"가 아니라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가에 있었습니다.
안티히어로 팀이라는 설정, 걱정이었지만 오산이었습니다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초능력 없는 히어로들의 모임'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인지도 면에서 기존 어벤져스와 비교하면 확실히 한 단계 아래인 멤버 구성. 심지어 저는 이번에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처음으로 건너뛸 만큼 마블에 피로감이 쌓여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극장을 간 건 순전히 의무감 비슷한 거였는데, 시작 10분 만에 그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안티히어로(Anti-Hero)란 전통적인 영웅의 덕목, 즉 고결함이나 순수한 선의를 갖추지 않은 채 주인공 역할을 맡는 캐릭터 유형을 말합니다. 썬더볼츠 멤버들은 이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옐레나는 발렌티나의 지시로 사람을 제거해온 암살자이고, 존 워커는 2대 캡틴 아메리카로 임명됐다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인물이며, 고스트(에이바 스타)는 양자 불안정성이라는 신체적 고통을 안고 사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양자 불안정성이란 물질의 양자 상태가 고정되지 않아 신체가 수시로 비물질화되는 현상으로, 영화에서는 만성적 고통의 원인으로 묘사됩니다.
이들이 발렌티나의 함정에 의해 한 공간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초반부 전개는 예상보다 훨씬 밀도가 높았습니다. 적이었다가 어쩌다 같은 편이 되는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각자의 캐릭터가 충돌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제가 직접 봐서 느낀 건데, 좁은 통로를 서로 등을 맞대고 기어올라가는 그 장면 하나로 이 팀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람 냄새 나는지가 동시에 전달됐습니다. 어떤 평론에서는 이 장면을 팀 케미스트리의 가장 효과적인 시각적 표현이라고 짚기도 합니다.
- 옐레나(2대 블랙 위도우): 암살 임무에 지쳐 세상에 나서고 싶어하는 감정선이 영화 전체를 이끔
- 존 워커(2대 캡틴 아메리카): 재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 자체가 의도된 연출, 뒤로 갈수록 호감으로 반전
- 고스트(에이바 스타): 대사보다 존재감으로 화면을 장악하는 조용한 지배력
- 레드 가디언: 예측 가능하지만 그래서 더 편안한 감초 역할
- 버키 반즈(윈터 솔저): 등장 타이밍과 액션이 맞물리는 장면이 영화 전반부의 하이라이트
센트리라는 존재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이유
이 영화의 진짜 무게중심은 센트리, 즉 밥이라는 인물에 있습니다. 솔직히 처음 밥이 등장했을 때는 그냥 평범한 단역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 자체가 연출의 핵심이었습니다. 센트리(Sentry)는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 "10만 개의 핵폭탄의 힘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는 캐릭터입니다. 쉽게 말해 마블 세계관 내에서 거의 신에 가까운 물리적 능력을 가진 존재인데, 그 힘이 평범하고 다소 소심한 일반인에게 깃들어 있다는 설정 자체가 드라마의 동력이 됩니다.
밥이 능력을 각성하고 발렌티나에게 이용당하다가 흑화하는 과정은 과장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밥이 어떤 악의 화신이 아니라 힘을 갑자기 얻게 된 평범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처럼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이드(Void)는 센트리의 어둠의 인격으로, 심리적으로는 자기 혐오와 억압된 분노가 외부로 발현된 존재를 상징합니다. 정신건강의학 분야에서 내면화된 부정적 자아상이 파괴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여러 경로로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보이드가 도시를 잠식하는 장면에서 피해자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속 정신 세계로 끌려간다는 설정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히어로 영화에서 이 정도 깊이의 심리적 공격 개념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마블 스튜디오가 그동안 양자 세계니 멀티버스니 하는 거대 서사를 쫓다가 놓쳤던 게 바로 이런 개인의 내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밥이 보이드를 주먹으로 때릴수록 오히려 잠식당하는 장면, 그리고 옐레나와 동료들이 그를 껴안으면서 보이드가 물러나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시각으로 압축해 보여줍니다. 내 안의 어둠을 부정하고 공격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지배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건 혼자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연결이라는 것. 히어로 영화에서 이 정도 메시지를 이 방식으로 전달한 작품은 제 경험상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센트리의 비중 밸런스에 아쉬움을 느끼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등장인물 전체의 서사 균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뉴어벤져스 탄생, 그리고 마블이 이 방향으로 가야 하는 이유
마지막 장면에서 발렌티나가 기자들 앞에 썬더볼츠 멤버들을 세우고 '뉴 어벤져스'라고 소개하는 순간, 저는 오랜만에 MCU 초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의 두근거림을 느꼈습니다. 이 장면이 아이언맨 1편의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 "아이 엠 아이언맨"의 오마주라는 걸 알고 나면 그 감정이 더 진해집니다. 히어로 영화에서 오마주(Homage)란 원작이나 이전 작품의 특정 장면·설정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연결감을 만드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단순한 팬서비스가 아니라 세계관의 계보를 잇는다는 선언입니다.
MCU 페이즈 5의 마지막 작품이 이 정도 볼륨이어도 되냐는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봅니다. 수십 개의 드라마와 영화를 연결해야 이해할 수 있는 거대 서사보다, 이 영화 하나만 봐도 완결되는 이야기가 훨씬 강합니다. 실제로 이번에 각 캐릭터의 서사를 사전에 한 번 정리하고 봤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보는 데 크게 지장이 없을 정도로 영화 내에서 맥락을 잘 풀어줍니다. MCU 세계관을 아예 모르는 관객이라도 하나의 독립 영화로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흥행 데이터를 보면 페이즈 4 이후 급격한 하락세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더 마블스 등은 제작비 대비 극장 수익이 손익분기점을 크게 밑돈 작품들입니다(출처: Box Office Mojo). 그 실패의 공통점이 '멀티버스'와 '우주적 스케일'에 집착했다는 점이라면, 썬더볼츠가 보여준 노선은 의미 있는 반증입니다. 액션 스펙터클보다 캐릭터의 내면, 우주 규모보다 사람 사이의 이야기. 이 방향으로 계속 만들 수 있다면 마블의 회복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 뉴어벤져스 구성의 강점: 슈퍼 솔저 3인(옐레나·존 워커·레드 가디언) + 비장의 카드 센트리라는 전력 구성
- 쿠키 영상 2개: 마지막 쿠키는 MCU 초기의 두근거림을 오랜만에 소환하는 수준
- 이전 드라마 미시청자도 진입 가능: 각 캐릭터 서사를 영화 내에서 충분히 설명
썬더볼츠는 흥행 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완성도만 놓고 보면 MCU 역대 상위권에 들어도 무리가 없는 작품입니다. 거대 서사 없이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알록달록한 CG 없이도 마블이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이미 극장을 놓쳤다면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오는 시점에 꼭 한 번 챙겨보시길 권합니다. MCU를 잘 모르는 분도, 마블에 실망했던 분도, 그냥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분도 모두 괜찮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aDu3yHZzIQ&list=PLzMlWTOO8JND1pjgph7yiCPtgUdJ9EOOi&index=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