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이 영화를 20대에 처음 봤을 때 그냥 잘 만든 영화라고 넘겼는데, 십수 년이 지나 다시 보고서야 왜 이게 걸작 소리를 듣는지 이해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야만 보이는 영화가 있다는 걸, 박하사탕이 증명합니다.역순서사 구조가 주는 충격박하사탕(1999)은 역순서사(reverse chronology) 방식으로 이야기를 풉니다. 역순서사란 이야기를 결말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술 방식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나 가스파르 노에의 되돌이킬 수 없는도 같은 방식을 씁니다. 그런데 박하사탕은 이 구조를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주제 그 자체로 사용합니다.영화는 1999년의 영호가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러닝타임 163분짜리 SF영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속편은 전작의 명성을 갉아먹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그 공식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원작이 던진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들어,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었습니다.레플리컨트가 묻는 것: 영혼이란 텍스트인가이 영화의 핵심 설정은 간단합니다. 레플리컨트(Replicant)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생체 노동자로, 외형과 행동이 인간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유사하게 설계된 존재입니다. 주인공 K는 그 레플리컨트 중에서도 다른 레플리컨트를 추적하고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란 탈출한 구형 레플리컨트를 '은퇴'시키는 임무를 수..
비전문 배우를 인스타그램에서 캐스팅해 3주 만에 현장에 투입한 영화가 있습니다. 브리아 비나이트, 1993년생. 그가 연기한 무니 엄마 핼리는 그 짧은 준비 기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날것 그대로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제가 느낀 감정은 감탄보다 당혹감에 가까웠습니다. 이게 연기인가,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인가 하는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거든요.핸드헬드 촬영과 네오리얼리즘이 만든 질감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촬영 방식부터 남다릅니다. 션 베이커 감독은 전작들을 아이폰으로 찍은 감독입니다. 이번 작품 역시 마지막 엔딩 시퀀스는 아이폰으로 촬영했는데, 이게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디즈니 월드 촬영 허가가 나오지 않아 몰래 아이폰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제약이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나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킬링 디어를 본 날 밤, 진짜로 그랬습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불쾌한 감정을 남기는 영화는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불쾌함이 오래 남았고, 결국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불편함이 설계된 영화라는 것킬링 디어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7년 작품입니다.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 방식이 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데,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배우, 조명, 소품, 공간 구성 등 모든 시각 요소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개념입니다. 킬링 디어에서는 이 미장센이 유독 차갑고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어딘가 인공적이고 낯선 느낌을 줍니다.저도 처음엔 그냥 "이상한 영화"라고만 느꼈는데, 씬 하나하나..
휴 잭맨이 17년간 연기한 울버린의 마지막 독립 영화, 로건은 로튼 토마토 관객 점수 93%에 전 세계 흥행 수익 6억 달러를 넘긴 작품입니다. 울버린 팬이었음에도 사정이 생겨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지 못했고, 이번에 제대로 각 잡고 봤는데 마지막에 눈물을 질질 짰습니다. 왜 이렇게 슬픈 영화인지, 어떻게 봐야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지 풀어보겠습니다.노쇠한 영웅: 기존 히어로 영화와 완전히 다른 출발점히어로 영화를 고를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예전 시리즈 분위기 그대로겠지"라는 기대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로건은 시작부터 그 기대를 보기 좋게 짓밟습니다.이전 엑스맨 시리즈에서 울버린은 언제나 여유 넘치는 나쁜 남자 포스였습니다. 치유 능력, 즉 힐링 팩터(Healing Fa..
흑인 인권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고 나니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1960년대 NASA를 배경으로 한 세 흑인 여성의 실화. 저는 이 영화가 그냥 차별 고발물일 거라 짐작하며 앉았는데, 두 시간 뒤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아무것도 모르고 봤더니 오히려 좋았습니다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관련 정보를 하나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제목과 포스터만 봤고, 흑인 여성들이 나오니 인권 관련 이야기겠거니 했을 뿐입니다. 배경이 NASA라는 것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도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그게 오히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습 없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하나하나 새롭게 다가왔고, 그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에 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