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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불편함, 카타르시스, 희생양)

by 주.만.지 2026. 6. 3.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나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킬링 디어를 본 날 밤, 진짜로 그랬습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불쾌한 감정을 남기는 영화는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불쾌함이 오래 남았고, 결국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불편함이 설계된 영화라는 것

킬링 디어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7년 작품입니다.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 방식이 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데,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배우, 조명, 소품, 공간 구성 등 모든 시각 요소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개념입니다. 킬링 디어에서는 이 미장센이 유독 차갑고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어딘가 인공적이고 낯선 느낌을 줍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이상한 영화"라고만 느꼈는데, 씬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정말 잘 만든 영화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장외과의 스티븐이 소년 마틴에게 고급 시계를 선물하는 장면, 병원에서 동료에게 "딸 친구"라며 거짓말하는 장면, 이런 디테일들이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모티브는 그리스 신화 속 이피게네이아(Iphigenia) 이야기입니다. 이피게네이아란 아가멤논 왕이 신의 분노를 사자 딸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던 신화로, 킬링 디어의 원제 The Killing of a Sacred Deer에서 "성스러운 사슴"이 바로 이 희생양을 상징합니다. 한국 제목은 그냥 킬링 디어인데, 원제를 알고 나면 영화 전체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원인과 결과가 초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논리적 해결이 불가능함
  • 주인공이 도덕적 선택을 끝까지 회피하다 결국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결말에 도달함
  •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흐릿하게 설계되어 있어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곳이 없음

이 구조 자체가 의도적입니다. 불편하다면, 그건 연출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뜻입니다.

카타르시스 없이 끝나는 이유

보통 공포나 스릴러 영화는 클라이맥스 이후 어느 정도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옵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비극을 감상하면서 관객이 감정적으로 정화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그런데 킬링 디어는 이 카타르시스를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스티븐은 끝내 자신의 잘못을 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족을 묶고, 눈을 가린 채 총을 쏩니다. 결국 아들 밥이 죽고,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식당에 앉아 마틴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납니다. 이 장면이 주는 공허함은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 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내가 스티븐이었으면 마틴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영화 속 스티븐의 행동이 공감이 안 되니까 더 답답하고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면에서 킬링 디어는 고전적인 비극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심리적 공포를 덧씌웁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발단에서 결말까지 어떤 논리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서사학 개념입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 구조를 활용해 관객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그 답을 끝까지 주지 않습니다.

심리학 분야에서도 이 영화가 유발하는 반응은 설명됩니다. 극 중 마틴의 저주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통제 불능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과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은 확실한 위협보다 더 크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희생양이 던지는 질문

영화가 끝나고 남는 건 결국 한 가지 질문입니다. "누가 죽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스티븐도, 안나도, 아이들도 모두 무너집니다.

희생양(scapegoat) 메커니즘이란 집단이 내부 갈등이나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 개인이나 대상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심리학적 현상입니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양 이론에서 나온 개념인데, 킬링 디어는 이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가족 단위에 적용합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버지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마틴의 복수 요구는 어떻게 보면 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거울 반사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배리 케오간의 연기였습니다. 어눌한 듯 보이는 말투와 행동 뒤에 감춰진 냉정함, 그리고 어른들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정말 소름 돋을 정도였습니다. 니콜 키드먼의 안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어쩌면 가장 무서운 캐릭터였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같은 감독의 랍스터도 봤는데, 개연성 없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랍스터는 로맨틱한 코드가 있어서 거부감이 덜했고, 킬링 디어는 죄의식과 응보(retribution)를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에 훨씬 무겁게 남습니다. 응보란 잘못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개념으로, 마틴이 스티븐에게 요구하는 것의 본질이 바로 이 응보입니다.

영화 속 사회적 계층의 문제도 짚어볼 만합니다. 스티븐은 저명한 심장외과 전문의이고 안나는 안과 의사입니다. 이들 부부가 보여주는 특권 의식,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가볍게 넘기려는 태도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료 과실(medical malpractice)이란 의사가 적절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말하는데, 스티븐이 마틴 아버지의 수술에서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영화는 끝까지 명시하지 않으면서도 암시합니다. 의료계의 이러한 책임 회피 문제는 실제로도 사회적 논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킬링 디어가 불편하다면 그 감정 자체가 정답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는 편안하게 보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서야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저는 그 질문들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만약 란티모스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낯설다면 랍스터를 먼저 보고 킬링 디어로 넘어오는 순서를 권해드립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께, 일단 개연성을 따지는 습관을 잠시 내려놓고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감각에 집중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KK1_98bf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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