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사람들이 많이 보는 영화는 괜히 보기 싫은데 입소문 한 번 믿어보자 싶어서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원래 전쟁영화는 엄청 선호하지도 않고, 명량도 그냥 통으로 건너뛴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산은 달랐습니다. 보고 나서 "이거 괜찮은데?"가 아니라 "이거 잘 만들었다"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전편을 안 봐도 되는 이유, 배우들 이야기한산이 명량의 프리퀄(prequel)이라는 점이 사실 처음엔 걸렸습니다. 프리퀄이란 기존 작품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사건을 다루는 후속작을 뜻하는데, 보통 전편을 봐야 맥락이 닿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한산은 명량을 안 본 저도 전혀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편 없이 이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
3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가면서 중간에 졸지 않을 자신이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솔직히 저도 반신반의하며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체감 상영 시간이 두 시간도 안 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뭔가 다른 영화였습니다.3시간이 짧게 느껴진 이유영화는 크게 세 페이즈로 나뉩니다. 핵 개발 이전, 맨해튼 프로젝트 진행, 그리고 핵 투하 이후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으로,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제가 특히 압도됐던 건 초반 핵 개발 이전 파트였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이론 물리학자로서 양자역학의 세계에 빠져들던 시절을 원자의 움직임, 별의 붕괴 같은 이미지로 시각화해..
서부극인 줄 알고 틀어놨다가 어느 순간 쿠키 굽는 장면에 홀딱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 영화 보면서 딱 그랬습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총도, 결투도, 말달리기도 없는 서부극입니다. 그런데 보고 나면 꽤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쿠키와 우유, 이게 서부극 맞나요처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아무 정보도 없이 앉았습니다. 포스터에 소 한 마리와 두 남자가 있어서 막연히 개척 시대 버디 무비겠거니 했는데, 첫 장면부터 뭔가 달랐습니다.영화는 1820년대가 아니라 현재에서 시작합니다. 이른바 프롤로그(prologue) 시퀀스라고 부르는 구성인데, 여기서 프롤로그란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배치되는 도입부 장면을 말합니다. 한 여성이 개와 함께 컬럼비아 강변을 산책하다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을 바탕으로 2021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3시간짜리 영화라는 말에 솔직히 조금 겁먹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중간에 나오고 싶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다만 좋다고 자신 있게 추천하기도, 별로라고 잘라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영화였습니다.원작과 영화 사이, 얼마나 달라졌나이 영화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 단편입니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같은 단편집 안에 있는 세헤라자드, 그리고 목록에 없던 또 다른 이야기의 모티프까지 끌어와 한 편의 장편으로 재조립했습니다. 여기에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영화 안에 또 하나의 레이어로 삽입하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이른바 극중극(劇中劇) 기..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란 으레 수용소 안의 참상을 정면으로 들이밀거나 눈물을 강요하는 방식일 거라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달랐습니다. 잔인한 장면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악의 평범성 — 루돌프 회스 가족의 일상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개념이 바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었습니다.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란 거대한 악이 괴물 같은 개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무사유(thoughtlessness), 즉 생각하기를 멈춘 상태에서 비롯된다는 개념입니다. 아렌트가 1963년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며 정식화한 이 개념은..
3시간 30분짜리 영화를 중간에 끊지 못하고 끝까지 봤습니다. 오줌도 참으면서요. 저한테 그게 명작의 기준입니다. 아이리시맨은 그 기준을 가볍게 통과했습니다.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진짜 인생 진짜 허망하네."3시간 반을 버티게 만드는 몰입감의 정체솔직히 처음엔 걱정했습니다. 3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도전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까 이상하게 끊기가 싫더라고요. 명작들에는 공통적으로 이런 게 있습니다. 연출의 호흡이 뭔가 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집중력이 유지되는 느낌. 대사가 좋거나, 화면이 좋거나, 궁금증이 계속 생기거나. 아이리시맨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씁니다.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프랭크 시런이 오랜 친구이자 보스인 지미 호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