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각색상을 한꺼번에 가져간 영화가 있습니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저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한동안 자리를 못 떴습니다. 뭔가 찝찝한데, 그게 나쁜 찝찝함이 아니었거든요.선의가 죽음을 부르는 세계, 인과율의 붕괴이 영화를 두고 "권선징악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인과율 자체가 무너진 세계를 그린다고 봅니다. 여기서 인과율이란 원인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연결된다는 법칙, 쉽게 말해 착하게 살면 보상받고 나쁘게 살면 벌받는다는 세계관의 기본 전제입니다.루엘린 모스가 그 증거입니다. 그는 마약 거래 현장에서 200만 달러짜리 돈가방을 챙겨 도망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마다 '저기서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드는 분,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극장 불이 켜질 때까지 한동안 자리를 못 떴습니다. 비 오는 파리 골목, 헤밍웨이와 피카소를 실제로 만나는 장면들. 이게 그냥 로맨틱 판타지인가 싶었는데, 보고 나니 훨씬 더 씁쓸하고 날카로운 이야기였습니다.황금시대 사고방식, 우디 앨런은 왜 이 소재를 택했나일반적으로 우디 앨런 영화는 뉴욕 지식인의 신경증을 다루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가 그의 인터뷰와 발언들을 모은 자료를 훑어보면 조금 다른 면이 보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극장을 현실 도피처로 삼았고, 재즈와 1920년대 예술 세계를 아이돌처럼 동경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음악을 고를 때도 자신의 레코드에서 그..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 중 단 한 편을 꼽으라 했을 때, 최후의 두 작품에 남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2000년작 《화양연화》입니다. 저도 처음 개봉 때 봤고, 그 뒤로 나이 먹어 다시 봤는데 솔직히 그건 제가 기억하던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봤는데, 다시 보니 등장인물들의 고뇌와 뜨거운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더 무서운 열정이었습니다.공간이 감정을 죄는 방식, 그 구조를 뜯어보면이 영화가 왜 이토록 숨 막히게 느껴지는지, 저는 꽤 오랫동안 이유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테마곡만 흐르고 대사가 없는 장면들을 볼 때 숨이 턱턱 막히도록 몰입됐거든요. 그 이유를 뒤늦게 파악했을 때, 답은 '공간'이었습니다.영화의 배경은 1962..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집니다.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게 관심인지 집착인지 헷갈릴 때쯤 영화 클로저를 다시 꺼내 봤습니다.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이 걸리는 영화인데, 이번엔 유독 댄의 태도가 눈에 밟혔습니다.낯선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는 순간영화는 런던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댄과 앨리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작은 교통사고로 이어지고, 그 다정한 순간이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듭니다. 이 설정이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의 도입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습니다.영화 제목 클로저(Closer)는 '더 가까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헬라어 스트레인저(Stranger), 즉 '낯선 사람'이라는 대..
"봄날은 간다"는 2001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멜로 영화입니다. 처음엔 그냥 썸타다가 사귀다가 헤어지는 구조겠거니 했는데, 넷플릭스로 다시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사랑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꽤 냉정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라면 한 그릇이 말해주는 것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라면 먹을래요?"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라면 먹고 갈래요?"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자막을 켜고 확인해 보니 정확히는 "라면 먹을래요?"더군요.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이 대사 하나가 영화 전체의 온도를 압축하고 있습니다.라면은 이 영화에서 일종의 모티프(motif)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모티프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 등장해 주..
헤어진 사람의 기억을 통째로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한때 그러고 싶었습니다. 스물아홉을 보내고 서른을 앞둔 올해, 오랜만에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틀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이 울었습니다. 기억을 지우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부서지는지,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와 닿았습니다.기억삭제, 실제로 작동하는가일반적으로 기억을 지우면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제가 스물세 살에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기억 삭제라는 SF적 설정이 신기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게 얼마나 순진한 독해였는지 바로 보였습니다.영화 속 라쿠나(Lacuna)사는 고통스러운 관계에 대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