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살 감독이 만든 영화가 A24 역사상 최연소 감독 타이틀을 가져갔습니다. 케인 파슨스 감독은 16세에 유튜브 시리즈로 수억 뷰를 찍더니, 이번엔 장편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극장에서 나오면서 "이게 20살이 만든 거라고?" 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문제는 그 감탄이 백룸 자체보다 현실 세계 장면들에서 더 강하게 나왔다는 점입니다.
800평 세트장이 만들어낸 공간감의 정체
이 영화의 백룸 세트는 실제 800평 이상 규모로 제작됐습니다. 촬영 중 스태프들이 길을 잃었다는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솔직히 이 부분에서 예상 밖이었습니다. 유튜브 원작 시리즈를 보면서 당연히 CG겠거니 했는데, 실제로 찍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작동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가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입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란 익숙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져 있어 이질감과 불안감을 유발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텅 빈 쇼핑몰, 아무도 없는 복도, 새벽 4시의 편의점 같은 곳들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 영화는 그 감각을 노란 벽과 형광등, 끝없이 반복되는 카페트 바닥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더 감탄한 건 오히려 현실 세계의 장면들이었습니다. 공간 디자인과 빛의 활용, 구도 같은 것들이 백룸 장면 못지않게 치밀했습니다. 백룸은 유튜브로 이미 접한 콘텐츠라 신선함이 다소 옅었는데, 현실 파트에서 오히려 더 자주 멈추게 됐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흥미로운 역설이었습니다.
- 노란 벽, 깜빡이는 형광등, 칙칙한 카페트 — 이 세 가지가 공간의 시각적 원재료
- 건물 내 조형물이 사실상 전부 사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각형의 공포'를 만들어냄
- 빠른 점프스케어 없이 미지의 공간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느린 서스펜스' 구조
클락과 메리, 두 사람의 심리 서사
이 영화가 단순한 공간 공포물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지점은 심리 서사를 집어넣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 클락은 꿈이 건축가였던 남자입니다. 공간을 창조하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가구점 사장이 됐다는 설정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비유입니다. 공간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그 공간 속에 가구처럼 퇴적되어 버린 존재가 된 것이죠.
클락의 가게 이름이 '캡틴 클락의 오스만 제국'인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경쟁 가게 '빅웨인 퍼니처'는 미국인들에게 친숙한 서부 시대 카우보이 이미지를 쓰는데, 클락은 아무도 익숙하지 않은 오스만 제국을 꺼내 듭니다. 이 차이가 처음엔 그냥 마케팅 감각이 없는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저도 극장에서 그냥 '장사가 왜 안 되는지 알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이건 자기 삶이 회복 불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현실로부터 극단적으로 멀리 도망가려는 심리적 발현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메리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환자에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어린 시절 집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사는 인물입니다. 남에게는 새로운 길로 가라고 하면서 본인은 똑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현실에서도 적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이 캐릭터가 꽤 날카롭게 다가왔습니다. 심리치료 분야에서는 이를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라고 부릅니다. 역전이란 치료사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이나 갈등을 투영하는 현상으로, 치료사 스스로도 수퍼비전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집에서 쫓겨난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클락은 아내와의 불화로, 메리는 철거로. 방식은 달라도 '내가 있어야 할 공간에서 밀려났다'는 상실감이 같습니다. 백룸이 각 인물의 심리를 반영해 모습을 바꾼다는 설정이 이래서 작동하는 겁니다.
미스터리를 풀지 않는다는 선택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많이 갈리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백룸이 뭔지 끝까지 안 알려주더라"는 반응이 극장 밖에서 실제로 많이 들렸습니다. 제 옆에서 나온 커플은 10점 만점에 1점이라고 했고, 반대편에서는 유튜브 시리즈 찾아봐야겠다고 흥분해 있었습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 이 정도로 갈리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장르 영화는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궁금증을 쌓아 올리다가 마지막에 "사실은 이거였어"로 마무리하는 공식이죠. 1997년 개봉한 영화 큐브(출처: IMDb - Cube(1997))나 매트릭스처럼 공간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설득하면서 성공한 작품들도 결국 그 공간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설명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걸 거부합니다.
저는 이 선택이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장르적 전통이 있습니다. 코스믹 호러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나 존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하찮은지를 다루는 장르입니다. H.P. 러브크래프트로 대표되는 이 계보에서 '설명되지 않음'은 결함이 아니라 핵심입니다. 이 영화도 그 맥락 위에 있다고 봅니다. 백룸이 뭔지 답을 줬다면 영화의 절반이 날아갔을 겁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저도 백룸 유튜브 시리즈를 미리 접한 상태였기 때문에 순수하게 처음 접하는 분들이 느낄 긴장감과 압박감은 조금 옅게 경험했습니다. 이 영화를 아무 사전 정보 없이 봤다면 훨씬 강렬하게 즐겼을 것 같습니다. 코스믹 호러 특유의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공포를 온전히 느끼려면, 백룸이라는 현상을 모르는 상태가 오히려 유리합니다.
-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도구"가 아닌 "다루는 대상 자체"로 삼은 드문 선택
- 코스믹 호러 장르 특성상 설명하지 않는 것이 공포를 유지하는 방법
- 백룸 사전 지식이 있을수록 신선도가 떨어질 수 있으니 사전 조사 자제를 권함
이 영화가 서사 중심 관객에게 불친절한 이유
이 영화의 구조를 정직하게 말하면, 극을 끌어가는 건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주 목적이고, 이야기는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형태입니다. 클락과 메리의 서사가 잘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묻는 건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됐나"가 아니라 "이 공간이 무엇인가"에 가깝습니다.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형식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파운드 푸티지란 등장인물이 직접 촬영한 것처럼 보이는 영상 형식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저예산으로 화질을 낮춰도 오히려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방식입니다. 원작 유튜브 시리즈가 이 형식을 적극 활용했고, 영화도 그 문법을 일부 계승했습니다. 출처: IMDb - The Backrooms(2024)에 따르면 이 영화는 1990년 6월을 배경으로 설정해 시대적 질감을 더했습니다.
서사를 기대하고 들어간 관객이 "이게 뭔 소리야"라고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들을 보며 압박감을 즐길 수 있느냐, 그게 이 영화의 갈림길입니다. 저는 만듦새 자체가 전체적으로 좋아서 재미있게 봤지만, 극장에서 나오며 들은 1점이라는 평가도 완전히 이해됩니다. 틀린 감상이 아니라 다른 기대치를 갖고 들어간 결과입니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는 미술 개념도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맞닿아 있습니다. 데페이즈망이란 익숙한 사물이나 공간을 낯선 맥락에 배치해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과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초현실주의 기법입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중력을 무시하는 사물들이 주는 그 불편한 감각 말입니다. 이 영화는 그걸 건축 공간으로 구현했습니다. 익숙한 형광등과 카페트인데, 뭔가 이상하고 뭔가 없고, 뭔가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어떤 관객에게 권하느냐가 핵심입니다. 코스믹 호러 장르를 좋아하고, 설명되지 않는 미지의 것 앞에서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걸 즐기는 분들이라면 꽤 잘 맞을 겁니다. 반면 서사의 완결성과 결말의 해소감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확실히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저는 백룸을 사전에 알고 들어간 편이라 장르적 신선함이 다소 옅었지만, 연출력과 공간 디자인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였습니다. 아직 유튜브 원작 시리즈를 보지 않으셨다면,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찾아보시는 순서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