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기대를 거의 안 했습니다. DC 영화라는 말만 들어도 슬슬 피로감이 쌓이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뒤늦게 켜놓고 보다가, 어느 순간 화면에서 눈을 못 떼고 있더라고요. 플래시는 단순한 히어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시간 여행과 멀티버스를 소재로 쓰면서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스파이더맨과 닮은 플래시, 이게 우연일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스파이더맨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그냥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구조 자체가 닮아 있더라고요. 플래시의 주인공 배리 앨런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힙니다.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도 큰아버지를 눈앞에서 잃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죠. 부모를 잃은 경험이 캐릭터의 동력이 된다는 설정이 두 캐릭터에서 거의 똑같이 작동합니다.
여기서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캐릭터 아크란 주인공이 이야기 안에서 심리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플래시는 이 구조를 꽤 정교하게 밟습니다. 충동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과거를 바꾸려 했다가 더 큰 혼란을 만들고, 결국 받아들임으로 귀결되는 흐름이 교과서에 가깝습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영화 초반 장면이었습니다. 배리가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데도 몸이 굳어버리는 장면에서, 스파이더맨 2편에서 피자 배달을 늦게 도착하는 오프닝이 바로 겹쳤습니다. 슈퍼히어로인데 일상에서는 한없이 서툴다는 설정, 이게 주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DC에도 이런 캐릭터가 나왔구나 싶었고, 솔직히 반가웠습니다.
- 배리 앨런은 능력은 있지만 사회적으로 서툰 너드(Nerd) 캐릭터로 설정됩니다
- 멘토-멘티 구도가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과 플래시 사이에서 형성되고, 아이언맨-스파이더맨 관계와 구조가 거의 동일합니다
- 두 캐릭터 모두 가족 영화와 성장 영화의 문법을 슈퍼히어로 장르 안에 녹인 사례입니다
멀티버스, 이제 지겨운데 왜 또 신선했을까요?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개념, 이제 지겹다는 말이 나올 만합니다. 멀티버스란 서로 다른 법칙과 역사가 공존하는 평행 우주들의 집합을 가리킵니다. 마블이 어벤져스와 닥터 스트레인지 시리즈를 통해 이 설정을 워낙 반복한 탓에, 멀티버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또?"라는 반응이 먼저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플래시는 이 설정을 조금 다르게 씁니다. 영화 안에서 마이클 키튼이 스파게티 국수로 멀티버스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미 관객이 다 아는 내용을 굳이 설명하는 상황 자체를 유머로 돌려버립니다.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익숙해진 개념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입니다. 꽤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버디 무비(Buddy Movie) 설정이었습니다. 버디 무비란 성격이나 처지가 다른 두 인물이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장르 공식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두 인물을 동일한 사람의 현재와 과거로 설정합니다. 현재의 배리는 지식은 있지만 능력이 없고, 18살의 배리는 능력은 있지만 경험이 없습니다. 이 조합이 서로를 채워주는 방식이 꽤 신선했습니다. 같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버디를 이루는 구도, 이건 확실히 처음 본 설정이었습니다.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타임 패러독스란 과거를 바꾸면 현재가 달라지고, 그 현재가 다시 과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모순 구조를 가리킵니다. 백 투 더 퓨처가 이 문제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작품인데, 플래시는 여기에 에릭 스톨츠 캐스팅 에피소드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영화 안팎의 역사를 동시에 건드립니다. 현실의 캐스팅 사고가 허구의 세계관 안으로 들어온 셈이라 CG보다 이 장치가 더 재밌었습니다. 출처: IMDb, 백 투 더 퓨처(1985)
CG 품질에 대한 말이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스피드포스(Speed Force) 장면이 특히 논란이었는데, 스피드포스란 플래시가 초고속 이동과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 차원을 의미합니다. 저는 오히려 그 안에서 CG 스타일이 더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차원이라는 설정이 시각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어서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마이클 키튼이 나온다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단순한 카메오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등장하는 장면마다 존재감이 있었고, 이야기 안에서도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팬 서비스용으로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줄 알았거든요.
팬 서비스(Fan Service)란 기존 팬들이 반가워할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연출 전략입니다. 89년 팀 버튼의 배트맨을 보며 자란 관객이라면 마이클 키튼의 등장 자체가 일종의 감정적 방아쇠가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키튼의 배트맨을 이야기의 철학적 축으로 씁니다. 과거를 바꾸려는 플래시, 과거를 받아들이라는 벤 애플렉의 배트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하는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 세 인물의 입장 차이가 이 영화의 주제를 떠받칩니다.
호러 감독 출신이 블록버스터를 만들 때의 이야기를 잠깐 하면, 샘 레이미, 제임스 완, 제임스 건이 모두 그 사례입니다. 앤디 무시에티도 IT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감독입니다. 제 경험상 이 계보의 감독들은 장면의 호흡과 긴장 완화 타이밍을 잘 압니다. 무거워질 것 같으면 개그를 끼워 넣고, 액션이 쏟아지다가 감정 씬으로 전환하는 완급 조절이 자연스러웠습니다. DCEU(DC Extended Universe), 즉 DC 확장 유니버스 안에서 비교하면 상당히 균형 잡힌 연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Rotten Tomatoes, The Flash(2023) 평가
슈퍼걸도 예상보다 매력 있었습니다. 캡틴 마블과 비슷한 종류의 액션을 펼치는데, 무게감보다 속도와 파워를 앞세운 스타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슈퍼걸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대안적인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 두 명의 플래시, 슈퍼걸이 모이는 그 구도 자체가 새로운 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요.
-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단순 카메오가 아니라 이야기의 철학적 균형추 역할을 합니다
- 앤디 무시에티 감독의 완급 조절은 DCEU 전작들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안정적입니다
- 슈퍼걸의 등장은 대안 저스티스 리그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결말 구조상 속편으로 연결하기는 어렵습니다
흥행은 망했습니다. 그 사실이 좀 안타깝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영화가 실패한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영화 자체보다 DCEU라는 복잡하게 꼬인 세계관에 대한 관객의 피로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영화 자체는 생각보다 잘 만들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살짝 차오르는 장면도 있었고, 웃긴 장면도 있었고, 마이클 키튼을 보는 반가움도 있었습니다.
혹시 DC 영화에 지쳐 있다면, 플래시는 그 피로를 잠깐 내려놓고 볼 만한 작품입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특히 더 공감할 지점이 많을 겁니다. 팀 버튼의 배트맨(1989)이나 맨 오브 스틸을 미리 보면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지만, 모르고 봐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