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연상호 감독한테 조금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넷플릭스 시절 작품들을 보면서 "아이디어는 좋은데 뭔가 허술하다"는 느낌이 반복됐거든요. 그런데 군체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한 숫자보다, 극장을 나오면서 느낀 그 묘한 찜찜함과 전율이 훨씬 더 오래 남았습니다.
집단지성 좀비라는 설정, 아이디어는 맞는데 표현이 문제였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건 좀비물이 아니라 SF 크리쳐물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체의 좀비들은 기존 좀비 장르의 공식을 완전히 해체합니다. 부산행에서 무작정 달려들던 감염자들과 달리, 이번 좀비들은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가집니다. 여기서 집단지성이란 개별 개체가 아닌 집단 전체가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학습하면서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개미 군락이나 벌집처럼 개체 하나하나보다 군집 전체가 훨씬 영리하게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아이디어를 AI 알고리즘의 작동 원리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AI가 방대한 데이터의 총합으로 학습하고, 오염된 데이터가 입력되면 잘못된 방향으로 업데이트되듯이, 군체의 감염자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처음엔 네 발로 기어다니던 좀비들이 정보를 공유할수록 직립 보행에 성공하고 점점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장면은,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이 집단지성이 실제로 구현되는 방식에서 제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감염자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특정 포즈와 그 순간 터지는 사운드는 장르적 쾌감을 주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현실감 있는 생물학적 진화처럼 보이기보다는 현대 무용 퍼포먼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20명의 현대 무용가들과 협업한 결과물이니 당연한 면도 있었죠. 설정의 세계관은 탄탄한데, 표현이 너무 직선적이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예술적으로 흐르는 순간들이 있어서 몰입이 살짝 끊기는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군체의 핵심 설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감염자들은 실시간 정보 공유를 통해 생물학적으로 진화한다 — 단순 감염체가 아닌 학습하는 유기체
- 초고층 빌딩이라는 수직 공간 설정 — 층이 올라갈수록 더 진화한 감염자들을 만나는 구조적 공포
- 바이오테러(Bioterrorism)의 시발점 서영철 — 여기서 바이오테러란 생물학적 물질을 이용해 대규모 감염 피해를 유발하는 행위를 말하며, 구교환의 연기가 이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냈다
- 장르 혼합의 시도 — 좀비물의 외피를 두른 집단지성 SF 크리쳐물이라는 이중 구조
연상호 감독은 존 카펜터 감독과 비슷한 냄새가 납니다. 세계관과 설정을 구축하는 데 탁월하고, 무언가 어두운 전체주의적 시선이 작품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군체 역시 결국 집단이 개별성을 집어삼키는 공포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이 지점은 영화 비평 매체 출처: 씨네21에서도 연상호 감독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꾸준히 주목해온 부분입니다.
좀비 진화의 공포보다 더 강렬했던 건 구교환이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구교환이었습니다. 개봉 전 포스터나 예고편에서는 전지현과 지창욱이 전면에 내세워졌는데, 막상 극장에서 앉아서 보니 구교환의 빌런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더군요. 미치광이 생물학자 서영철이라는 캐릭터를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로 소화해냈는데, 여기서 메소드 연기란 배우가 캐릭터의 심리와 감정을 실생활에서도 완전히 내면화해 극도로 몰입하는 연기 기법입니다. 구교환의 광기 어린 눈빛과 말투는 그냥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저 사람이 저 믿음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빌런을 정말 잘 만듭니다. 염력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논리와 신념이 있는 인물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요. 서영철은 인류를 다음 단계로 도약시키겠다는 그 왜곡된 확신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인데, 그 확신이 설득력 있게 전달될수록 영화의 공포가 배가됩니다. 이 점은 제 경험상 연상호 감독의 가장 일관되고 확실한 장점입니다.
전지현은 11년 만의 스크린 복귀를 알리듯 존재감을 내뿜었습니다. 점액질을 뒤집어쓰고도 흔들리지 않는 비주얼과 고강도 액션은 역시 그녀가 왜 장르물에서 1인자로 불리는지를 보여줬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전지현이나 지창욱의 일부 감정 장면에서 판에 박힌 연기가 살짝 보이기도 했습니다. 극을 끌고 나가기 위해 다소 서두른 전개들도 눈에 띄었고요. 제79회 칸 영화제 상영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출처: Festival de Cannes 공식 사이트)을 감안하면, 해외 관객들은 이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와 연출력에 더 집중한 것 같습니다. 국내 관객과 외국 관객이 주목하는 포인트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클라이맥스에 대해서는 제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초고층 빌딩에서 층층이 쌓아올린 공포와 긴장감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마무리가 너무 급하게 처리됐습니다. 스펙터클이 최고조에 달해야 할 그 순간에 영화가 서둘러 닫히는 느낌이 들었고, 그 아쉬움이 극장을 나와서도 꽤 오래 남았습니다. 쌓아올린 것에 비해 결말의 무게가 가벼웠달까요.
군체는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시절의 가벼움을 털어내고 극장용 대형 영화로 절치부심해 돌아온 작품이라는 인상이 분명합니다. 집단지성이라는 소재, 수직 공간의 공포, 구교환의 빌런까지 분명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디테일의 빈틈과 클라이맥스의 아쉬움이 있는 만큼, 완벽한 걸작보다는 "올해 극장에서 꼭 한 번은 봐야 할 좀비 블록버스터" 정도로 기대치를 잡고 가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즐겁고, 구교환의 연기만으로도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4-ZtGACRGE&list=PLk-7-Ua3JujVV9GXDF7AHOQZhDc-gY9g3&index=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