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만 보고 그저 그런 판타지 모험물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다가 두근거림에 눈물이 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벤 스틸러가 감독하고 주연한 이 작품, 그냥 흘려보낼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영화의 배경
제가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의 인상은 딱 하나였습니다. "상상을 하면 뿅 하고 이루어지고, 마지막엔 사실 상상이었어~ 하고 끝나는 영화." 여러 번 예고편을 봤음에도 그 인상을 10년 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봤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헌정 영화(tribute film)입니다. 헌정 영화란 특정 인물, 시대, 혹은 기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엔 출처: LIFE Magazine 공식 사이트인 라이프지(LIFE Magazine)를 향한 헌정입니다. 라이프지는 20세기 최고의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 잡지로 꼽혔던 매체입니다. 포토저널리즘이란 사진을 통해 뉴스와 역사의 순간을 기록하는 저널리즘 방식을 말합니다. 전성기엔 한 주에 수천만 명이 읽는 미국 최대 부수의 잡지였습니다.
하지만 재정 악화와 디지털 미디어의 급부상으로 라이프지는 폐간과 복간을 반복하다 2007년 결국 마지막 폐간을 결정하게 됩니다. 영화는 바로 그 시점, 정리해고(restructuring)가 진행되는 라이프지 사진 현상부에 근무하는 직원 월터 미티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정리해고란 기업이 경영 위기 등의 이유로 인력을 감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배경을 알고 나서야 월터의 무기력함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해했습니다.
- 라이프지: 1936년 창간, 포토저널리즘의 상징적 매체
- 2007년 최종 폐간, 재정 악화와 디지털 전환이 주요 원인
- 영화는 폐간 직전 라이프지 직원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함
월터라는 인물을 제대로 읽는 법
영화를 보면서 월터가 왜 이렇게까지 상상에 빠져 사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며 느낀 건, 그의 상상은 도피가 아니라 억눌린 욕망이 터져 나오는 통로라는 점이었습니다. 현실에선 이하모니(eHarmony) 프로필조차 채우지 못하고, 좋아하는 여성에게 윙크 하나 전송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상 속에선 빌딩을 박살내고 세계를 구합니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장치는 월터의 데이드림(daydream), 즉 백일몽 시퀀스입니다. 백일몽 시퀀스란 현실과 상상을 교차 편집해 주인공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영화 기법을 말합니다. 벤 스틸러는 이 기법을 단순한 코미디 장치로 쓰지 않았습니다. 상상이 거대해질수록 현실의 월터가 얼마나 작고 지쳐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모험이 시작되면서 상상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린란드에서 빨간 마티즈를 몰고, 아이슬란드 광야를 스케이트보드로 질주하고, 히말라야 설원을 홀로 오르는 과정에서 월터는 더 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많은 영화가 놓치는 구조인데, 이 영화는 그 전환을 정말 자연스럽게 그려냅니다. 마흔이 되어가는 지금 다시 보니, 20대 후반에 봤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울림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월터가 멋있어 보였다면, 지금은 월터의 지침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OST 활용도 탁월합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Space Oddity'가 그린란드 장면에서 흘러나올 때, 저는 영화보다 음악이 앞서 울었습니다. 음악 감독의 선곡이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서사의 일부로 기능하는 사운드트랙 내러티브(soundtrack narrative) 방식이었습니다. 사운드트랙 내러티브란 삽입된 음악이 장면의 감정을 단순히 강화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 백일몽 시퀀스: 주인공의 억눌린 욕망을 시각화하는 서사 장치
- 현실 모험이 시작될수록 상상은 줄어드는 역비례 구조
- 사운드트랙 내러티브: 'Space Oddity' 등 선곡이 장면 서사를 직접 전달
이 영화가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이유
영화 말미에 라이프지 마지막 호 표지에 실린 사진이 공개됩니다. '삶의 정수를 담았다'는 25번 사진. 그 사진은 유명 사진가나 절경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가장 오래 멈췄습니다. 라이프지의 모토(motto)인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이 이 한 컷 안에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라이프지는 실제로 이 모토를 1936년 창간호부터 사용했습니다(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LIFE Magazine 컬렉션). 포토에세이(photo essay) 형식으로 세상을 기록하겠다는 선언이었는데, 포토에세이란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나 주제를 전달하는 시각 저널리즘의 한 형태입니다. 그 정신이 영화 안에서 월터의 여정과 정확히 겹칩니다.
벤 스틸러가 감독이라는 사실, 저도 뒤늦게 확인하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주연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장엄한 아이슬란드 풍경과 키치한 상상 시퀀스를 동시에 연출한 사람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참고로 벤 스틸러는 이전에 '괜찮아요 미스터 브레드(Zoolander)' 등도 연출한 바 있는데, 이 영화와는 결이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인생에서 라이프지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저는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됩니다. 회사가 해체된 이후에도 그 멋짐이 남아있는 조직이란 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꿈을 접고 살아가던 월터가 마침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이, 지금 저에게도 작게나마 뭔가를 건드렸습니다. 오랜만에 영화 보다가 '기분 좋음'을 느꼈습니다.
판타지물인 줄 알고 피하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화려한 액션도, 반전도 없습니다. 대신 아이슬란드 광야를 달리는 한 남자의 뒷모습과, 그 위로 흐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영화입니다. 다 보고 나서 라이프지의 역사를 한 번 검색해 보시면 영화가 한 겹 더 깊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