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이 영화를 좀비 영화라서 찾아본 게 아닙니다. 대니 보일 감독 영화라서 봤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대 포인트 자체가 달랐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그 지점에서 저는 오히려 납득이 됐습니다. 망작이라는 말이 워낙 많아서 극장 가려다 말았던 분들, 그 선택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장르 기대를 버려야 보이는 것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불만이 뭔지 아십니까. "좀비 영화인데 좀비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 속 갈등 구조는 인간 대 인간으로 짜여 있고, 좀비 떼가 창궐하는 지옥도는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1편보다 좀비 관련 시각적 장면이 오히려 적습니다.
장르 컨벤션(genre convention), 즉 특정 장르 영화가 관객과 암묵적으로 맺는 약속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장르 컨벤션이란 공포 영화라면 무서운 장면, 좀비 영화라면 뜯겨 나가는 장면 같은, 관객이 입장권을 살 때 기대하는 요소들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그 약속을 상당 부분 어깁니다. 그래서 워킹 데드나 라스트 오브 어스 같은 서사 밀도 높은 작품들로 이미 눈이 높아진 분들에게는 특히 더 기대 미달로 느껴졌을 겁니다. 저는 그 명작들을 아직 안 봤으니 눈이 낮아서 괜찮았던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실제로 보면서 맘에 들었던 건 초반 연출과 편집이었습니다. 본섬에서 빠져나올 때의 쫄깃한 긴장감, 좀비마다 다른 특성을 부여한 설정이 마치 피안도나 RPG 게임 속 몬스터 분류처럼 보여서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대니 보일 영화에서 제가 기대하는 건 스토리의 완결성보다는 그 특유의 리듬감과 소리인데, 그 부분은 충분히 충족됐습니다.
영화가 설계하는 구도 자체는 꽤 촘촘합니다. 지미 크리스탈이 이끄는 컬트 집단과 닥터 켈슨이 알파 좀비 삼손을 돌보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대척점으로 배치됩니다. 컬트(cult)란 교주 중심의 폐쇄적 집단 신앙 체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구성원 모두를 지미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겉으로는 평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구조입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는 문장이 떠오르는 설계입니다.
- 좀비 영화 기대로 입장하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르 컨벤션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습니다.
- 대니 보일 특유의 사운드 연출과 편집 리듬은 살아 있습니다. 그걸 기대하고 간 분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 지미 크리스탈의 컬트 집단과 켈슨-삼손의 관계는 처음 두 장면부터 모든 면에서 대조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산딸기를 먹은 순간, 저는 울컥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호불호 갈린다고 꼽는 장면이 있습니다. 의사를 만난 이후 전개가 갑자기 해골 이미지로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몇 분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해골이 되어 돌아오는 속도감에 엥? 싶으실 수 있습니다. 저도 전개 속도가 빠르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부분에서 오히려 멈췄습니다. 가족이 오래 아팠다가 마지막을 보낸 경험이 있어서인지, 삶의 마지막 순간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제가 본래 생각했던 것과 결이 겹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영화적 생략이라고 보면 그만이고, 메세지만 따로 떼어내도 저는 공감이 됐습니다. 물론 그 공감이 없는 분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알파 좀비 삼손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도 꽤 인상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좀비는 육식 동물입니다. 과일이나 채소를 먹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가 산딸기를 먹는 장면은 단순한 코믹 연출이 아닙니다. 그다음 장면부터 삼손이 하체를 가리고 나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뒤 자신의 몸을 가린 것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여기서 이 영화가 사용하는 것이 알레고리(allegory)인데, 알레고리란 표면적인 이야기 뒤에 다른 의미를 숨겨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에덴 동산 이야기 전체가 알레고리로 깔려 있습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이 지점이 갈립니다. 은유가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은유(metaphor)란 원래 감춰진 비유를 뜻하는데, 이 영화는 그 밑그림이 너무 선명해서 감춰진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부분은 약간 느꼈습니다. 아담과 이브, 거꾸로 매달린 적그리스도, 동물 농장의 궤변 같은 요소들이 한 번에 읽혀버리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직유에 가까운 알레고리가 불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밑그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영화는 아니라는 방증이니까요.
음악 선택도 제가 맘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듀란 듀란, 라디오헤드, 아이언 메이든이 등장하는데, 아이언 메이든의 'The Number of the Beast'가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황당하고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실제로 아이언 메이든은 밴드 이름 자체가 중세 고문 도구에서 따온 것이고, 해당 곡은 멤버가 오멘 2를 보고 악몽을 꾼 뒤 쓴 가사입니다(출처: Iron Maiden 공식 사이트). 그 배경을 알고 보면 레이 파인스가 악마 흉내를 내는 장면이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굉장히 치밀하게 설계된 유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킬리언 머피의 장면은 3편을 향한 떡밥이기도 하지만, 1편의 가장 첫 대사를 사운드로 깔고 시작한다는 구조 자체가 이 시리즈 전체의 정체성을 이 영화 안에서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쓰입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펼쳐지는 방식에서 타이틀이 두 번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1편 전체 시리즈의 연장선임을 먼저 선언하고, 이어서 이번 3부작의 중간 편임을 명시하는 방식입니다(출처: IMDB - 28 Years Later: The Bone Temple).
- 삼손의 인간성 회복 과정은 산딸기 섭취 → 수치심 인식 → 기억 회복의 단계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 영화 전반에 깔린 알레고리는 에덴 동산, 동물 농장, 안드로클레스와 사자 등 고전 서사를 직접 참조합니다.
- 아이언 메이든 사용은 단순 BGM이 아니라 "누가 누구를 통제하는가"라는 영화의 핵심 테마와 연결됩니다.
이 영화를 아직 망설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좀비 영화 기대를 내려놓고 대니 보일 감독의 시각 언어를 즐기는 방식으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요즘같이 2시간 짜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도 득실을 따기게 되는 시대에, 그 2시간의 투자가 맞는지 아닌지는 결국 내가 뭘 기대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