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사람들이 많이 보는 영화는 괜히 보기 싫은데 입소문 한 번 믿어보자 싶어서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원래 전쟁영화는 엄청 선호하지도 않고, 명량도 그냥 통으로 건너뛴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산은 달랐습니다. 보고 나서 "이거 괜찮은데?"가 아니라 "이거 잘 만들었다"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전편을 안 봐도 되는 이유, 배우들 이야기
한산이 명량의 프리퀄(prequel)이라는 점이 사실 처음엔 걸렸습니다. 프리퀄이란 기존 작품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사건을 다루는 후속작을 뜻하는데, 보통 전편을 봐야 맥락이 닿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한산은 명량을 안 본 저도 전혀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편 없이 이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는 박해일은 솔직히 제가 기대하는 배우 중 하나입니다. 나온 작품마다 실망시킨 적이 없었거든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사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절제된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쌓이는 방식으로 연기를 풀어냅니다. 역사 기록상 한산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의 나이가 마흔일곱이었고, 박해일은 당시 마흔다섯이었습니다. 나이대가 맞아떨어지는 캐스팅이라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변요한이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으로 나온다는 건 예고편 보기 전까지 전혀 몰랐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의외다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캐스팅이 꽤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장이 밋밋하거나 단순히 악인으로 그려지면 주인공의 승리도 가벼워지거든요. 한산의 와키자카는 지략도 있고 담력도 있는 인물로 그려져서, 그 상대를 이기는 이순신의 전략이 더 빛을 발하는 구조입니다.
한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서사 장치는 항왜(降倭) 캐릭터 준사입니다. 항왜란 왜군 출신이면서 조선 수군에 귀순해 함께 싸운 인물을 뜻합니다. 단순히 배신자가 아니라, 의(義)와 불의(不義) 사이에서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인데, 영화가 말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가 이 준사를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한산대첩의 핵심, 학익진과 거북선이 만든 51분
영화의 절반은 해전입니다. 무려 51분 분량의 해상 전투 씬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전술이 바로 학익진(鶴翼陣)입니다. 학익진이란 학이 날개를 펼친 형태로 함선을 배치해 적을 반원 형태로 포위하는 진법으로, 중앙으로 돌진해오는 적을 양쪽에서 집중 공격하는 방식입니다. 교과서에서 한 줄로 배웠던 그 개념이, 영화에서는 함선들이 실제로 호를 그리며 펼쳐지는 장면으로 구현됩니다.
제가 전쟁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전술이 뭔지 따라가기 어렵다는 점인데, 한산은 그 점에서 친절했습니다. 학익진이 어떻게 펼쳐지고, 적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 과정에서 거북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단계적으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문 용어를 몰라도 흐름이 읽히는 연출이었습니다.
거북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가 충파(衝破) 전술입니다. 충파란 배를 직접 적선에 들이받아 파괴하는 방식으로, 거북선의 견고한 선체 구조가 이 전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영화는 여기에 첩보 요소를 더해 극적 긴장감을 높입니다. 왜군 첩자가 거북선 설계도를 탈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덕분에 와키자카가 거북선의 약점을 파악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사이 조선에서는 업그레이드된 새 버전의 거북선을 완성합니다. 이 예측과 반전의 구도가 해전 클라이맥스를 훨씬 더 재밌게 만들어줬습니다.
제가 한산을 보면서 처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 바로 첩보 파트였는데, 이게 꽤 탄탄하게 짜여 있었습니다. 조선군과 왜군 양쪽이 서로의 진영에 첩자를 보내고, 그 첩자가 각각 탈출하는 장면이 교차로 보여집니다. 일방적으로 아군만 비추지 않아서 영화가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한산대첩이 실제 전투라는 점에서 영화의 참고 가치도 있습니다. 한산도 해전은 1592년 8월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로,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결정적 계기로 평가받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영화가 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했는가를 따져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영화 관람 환경도 이번 선택에 한몫했는데,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 상영관에서 봤습니다. 돌비 애트모스란 상하좌우 입체 음향을 통해 소리의 방향감을 실감 나게 전달하는 사운드 시스템입니다. 해전 씬에서 포 소리, 파도 소리, 북소리가 입체적으로 쏟아지는 게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 소음 속에서 이순신 장군의 명령이 일반 관객에게 잘 안 들릴 수 있다는 걸 감독도 알았는지, 한국어 대사에 자막을 띄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처음엔 낯설었는데, 금방 적응됐고 오히려 집중도가 올라갔습니다.
한산에서 주목할 연출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어로 시작하는 오프닝: 적군 시점에서 거북선의 공포를 먼저 보여주는 방식
- 학익진과 충파 두 전술의 클라이맥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설계된 두 개의 절정
- 이순신의 꿈 시퀀스: 적의 전술을 미리 체험하는 형식의 복선 장치
- 한국어 대사 자막 처리: 해전 소음 속에서도 대사를 놓치지 않게 배려한 선택
명량과 비교해서, 이 영화가 잘 된 이유
저는 명량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명량을 본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반부가 길고 답답하다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한산은 그런 느낌이 거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 아는 이야기라서 오히려 발단과 전개를 과감하게 압축하고, 위기-절정-결말에 집중한 구조가 스피디하고 좋았습니다.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영화의 서사 구조 측면에서 보면, 한산은 단일 목표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이순신의 가족이나 개인사는 전혀 나오지 않고, 다른 장수들의 사생활도 없습니다. 오직 한산대첩과 그것을 둘러싼 전략 갈등만 다룹니다. 이 집중력이 영화를 깔끔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캐릭터 개개인이 더 살아났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긴 합니다만, 대중 영화로서의 완성도는 꽤 높습니다.
일본군 묘사 방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국민을 학살하거나 잔학 행위를 보여주는 식의 민족 감정 자극은 없었습니다. 전술 대 전술의 싸움으로만 그려졌는데, 그게 오히려 영화의 품격을 높였다는 느낌입니다. 영화 전반의 메시지가 '민족 대 민족'이 아니라 '의(義) 대 불의(不義)'의 싸움임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어서, 관람 후에도 찜찜한 감정이 남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관련 역사 연구에서도 이 전투가 단순한 민족 전쟁이 아닌 동아시아 해상 패권의 분기점으로 분석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솔직히 액션씬이 시사회 후기에서 읽었던 것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전설의 해전을 재현했다"는 표현이 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시원함은 확실했고, 다 알고 보는데도 국뽕의 힘은 역시 무서웠습니다.
여름에 극장에서 볼 영화를 고민 중이라면, 한산은 충분히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선택입니다. 전쟁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저도 재밌게 봤다면, 그게 가장 솔직한 추천 문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명량을 안 보셨어도, 역사를 잘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가서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