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가면서 중간에 졸지 않을 자신이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솔직히 저도 반신반의하며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체감 상영 시간이 두 시간도 안 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뭔가 다른 영화였습니다.
3시간이 짧게 느껴진 이유
영화는 크게 세 페이즈로 나뉩니다. 핵 개발 이전, 맨해튼 프로젝트 진행, 그리고 핵 투하 이후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으로,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제가 특히 압도됐던 건 초반 핵 개발 이전 파트였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이론 물리학자로서 양자역학의 세계에 빠져들던 시절을 원자의 움직임, 별의 붕괴 같은 이미지로 시각화해 보여주는데, 그냥 황홀했습니다. 과장 없이 그 단어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양자역학이란 원자 이하의 극미세 세계에서 입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다루는 물리학 이론으로, 기존 고전역학으로는 설명이 안 됐던 현상들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이걸 CG로 시각화하는 방식이 꽤나 감각적이었고, 여기에 한스 짐머 아닌 루드비히 고란손의 음악이 더해지면서 초반부터 완전히 끌려들어 갔습니다.
컷 전환이 굉장히 빠른 편이라 청문회 장면처럼 대사 비중이 높아질 때도 지루함이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제가 예상 밖이라고 느꼈던 부분 중 하나입니다.
핵분열과 핵융합으로 읽히는 영화 구조
이 영화의 구조를 이해하면 감상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영화는 두 개의 청문회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954년 오펜하이머가 원자력에너지위원회로부터 받는 청문회이고, 다른 하나는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가 상무부 장관 인준을 위해 받는 상원 청문회입니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이 두 청문회를 각각 핵분열과 핵융합의 구조로 대응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핵분열이란 우라늄 235 같은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면서 쪼개지고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원자폭탄의 원리입니다. 반면 핵융합이란 수소처럼 가벼운 원자핵들이 서로 합쳐지면서 더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으로, 수소폭탄이 이 원리를 이용합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컬러 파트에는 시작 자막으로 '핵분열(Fission)'이, 스트로스의 흑백 파트에는 '핵융합(Fusion)'이 붙습니다. 단순히 분위기를 구분하려는 연출이 아닙니다. 수소폭탄이 터지려면 원자폭탄이 먼저 터져야 한다는 물리적 전제 조건처럼, 스트로스의 이야기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먼저 전개되어야만 성립됩니다. 놀란이 영화 구조 자체를 핵물리학의 반응 원리에 맞춰 설계했다는 게 직접 보고 나서야 실감됐습니다.
우라늄 235는 자연에서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원소로 오펜하이머의 비범함을 상징하고,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로 스트로스의 평범함을 상징하는 대비도 꽤 의도적으로 읽혔습니다.
킬리언 머피, 그리고 좀 과했던 연출
킬리언 머피는 이 영화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수상했고요. 아카데미가 전기 영화를 좋아한다는 건 업계에서도 공공연한 이야기인데, 그 전기 영화의 주인공이 오펜하이머고 연기까지 이 정도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저는 킬리언 머피를 오랫동안 감초 역할의 배우로만 봐왔습니다. 피키 블라인더스를 비롯해 조연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배우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이번엔 3시간 내내 화면 중앙에서 갈등과 고뇌를 견뎌냈습니다. 원폭 개발의 총책임자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성공에 도취됐던 자신 사이의 간극을 눈빛 하나로 버텨내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건 진짜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솔직히 좀 별로였던 건, 영화 내내 반복되는 심리 묘사 연출 방식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내면의 고통을 느낄 때마다 우주적 사운드와 폭발 이미지, 별의 붕괴 같은 시각 효과를 동원하는데, 처음 한두 번은 효과적이었지만 반복될수록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감독이 관객을 믿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쉬웠습니다.
등장인물 43명, 불친절한 영화를 즐기는 법
이 영화의 가장 큰 진입 장벽은 등장인물 수입니다. 확인해 보니 무려 43명이더군요. 게다가 대부분이 백인 중년 남성이라 시각적으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초호화 캐스팅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얼굴이 익은 배우들이 아니었으면 누가 누군지 따라가기가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영화 관람 전에 미리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핵심 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킬리언 머피):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
- 루이스 스트로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원자력에너지위원회 의장, 오펜하이머의 대척점
- 에드워드 텔러: 수소폭탄 개발의 핵심 과학자, 반공주의자
-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맨해튼 프로젝트를 군 측에서 총괄한 인물
영화는 설명을 거의 하지 않고 대화로만 진행됩니다. 전기문학(傳記文學)적 서사 방식, 즉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시대 전체를 재현하는 방식인데, 놀란은 여기서 관객이 스스로 맥락을 조립하도록 유도합니다. 그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제 경험상 세세한 인물 관계를 다 파악하지 못해도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놓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아서 두 번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이해도에 대해서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원작 전기를 미리 읽거나, 맨해튼 프로젝트의 기본 역사 정도를 숙지하고 가면 훨씬 깊이 있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전기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공동 집필해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으로, 놀란이 각본의 원본 자료로 삼은 책입니다(출처: 퓰리처상 위원회).
오펜하이머가 상징하는 것, 즉 비범한 개인이 권력 구조 안에서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은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온 패턴입니다.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미국 정부는 과학자들의 윤리적 우려를 무시하고 핵폭탄 투하를 강행했으며, 이후 오펜하이머를 안보 위협 인물로 몰아 청문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출처: 미국 에너지부 역사 자료실).
오펜하이머는 단순히 원폭 개발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고 나면 한동안 그 여운이 남는 영화입니다. 3시간이 부담되더라도, 일단 극장에서 한 번은 경험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놀란의 영화 중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면, 오펜하이머를 먼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