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극인 줄 알고 틀어놨다가 어느 순간 쿠키 굽는 장면에 홀딱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 영화 보면서 딱 그랬습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총도, 결투도, 말달리기도 없는 서부극입니다. 그런데 보고 나면 꽤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쿠키와 우유, 이게 서부극 맞나요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아무 정보도 없이 앉았습니다. 포스터에 소 한 마리와 두 남자가 있어서 막연히 개척 시대 버디 무비겠거니 했는데, 첫 장면부터 뭔가 달랐습니다.
영화는 1820년대가 아니라 현재에서 시작합니다. 이른바 프롤로그(prologue) 시퀀스라고 부르는 구성인데, 여기서 프롤로그란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배치되는 도입부 장면을 말합니다. 한 여성이 개와 함께 컬럼비아 강변을 산책하다 두 구의 해골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영화는 200년 전으로 훌쩍 뛰어넘어 갑니다. 보통 이런 구성이라면 마지막에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앞뒤를 연결해줘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1820년대로 넘어간 뒤 그대로 끝납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방식이 처음에는 좀 낯설었습니다. "왜 그 여자를 다시 안 보여주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중에 곱씹을수록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강변에서 해골을 발견한 여성이 상상해낸 이야기, 그게 바로 쿠키와 킹 루의 우정담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거든요.
영화의 실제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사냥꾼 무리의 취사 담당 쿠키가 쫓기는 중국인 킹 루를 품어주고, 몇 년 뒤 다시 만나 동업을 시작합니다.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암소, 즉 '퍼스트 카우'의 우유를 밤마다 몰래 짜서 빵을 만들어 파는 것입니다. 서부극인 줄 알았는데 쿡방이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설정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인가
쿠키는 유태인이고, 내성적이며, 요리를 합니다. 킹 루는 중국인이고, 이 땅 어디에도 뿌리를 두지 못한 떠돌이입니다. 우리가 흔히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떠올리는 인물상, 그러니까 강인하고 총 잘 쏘는 백인 남성과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이 영화에는 사실 일반적인 네오 웨스턴(neo-western)의 요소가 다 갖춰져 있습니다. 네오 웨스턴이란 전통적인 서부극의 시공간과 장르 문법을 계승하되, 현대적 시각이나 비주류 관점으로 재해석한 장르를 말합니다. 러시아 무법자 패거리도 있고, 농장주 팩터 대장도 있고, 변경에 배치된 장교도 있습니다. 이 인물들을 전면에 세우면 얼마든지 익숙한 서부극이 됩니다.
그런데 켈리 라이카트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싸움이 나면 구경 안 하고 자리를 피하는 두 사람, 총 대신 밀크를 짜고 쿠키를 굽는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처음에는 "왜 아무것도 안 일어나지?"라는 조바심이 생기는데, 어느 순간 이 잔잔한 리듬이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든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만남 자체가 대칭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 첫 번째 만남: 쿠키가 굶주리고 쫓기는 킹 루에게 음식과 텐트를 제공합니다.
- 두 번째 만남: 킹 루가 거친 야영 생활을 하는 쿠키를 자기 오두막으로 데려가 술과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 세 번째 만남: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서로를 찾아가는 우정 하나만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번은 쿠키가, 한 번은 킹 루가, 상대에게 거처를 내어준다는 구조가 마지막 장면에서 완성됩니다. 강변의 오목한 땅에 나란히 눕는 것으로요.
화면비 4:3이 만들어내는 밀착감
이 영화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곧 화면 비율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요즘 극장 영화는 보통 와이드스크린 비율인 1.85:1이나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비율인 2.35:1을 씁니다. 시네마스코프란 화면을 가로로 길게 늘려 파노라마 같은 웅장한 시각적 효과를 내는 촬영 방식을 가리킵니다.
퍼스트 카우는 아카데미 비율(Academy ratio)이라고 부르는 4:3을 씁니다. 아카데미 비율이란 1930~50년대 고전 영화 시대에 표준으로 쓰이던 가로세로 비율로, 지금의 텔레비전 화면처럼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습니다. 요즘 기준으로는 꽤 좁고 올드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의외로 영화와 딱 맞아떨어집니다. 두 사람을 함께 담는 투 샷(two shot)을 찍을 때 가로가 좁으니 두 인물이 자연스럽게 더 가까이 붙어야 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비율 덕분에 두 사람이 화면 안에서 늘 서로에게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우정이라는 주제가 형식 자체에 스며들어 있는 셈입니다.
또 이 영화에는 높은 나무나 채집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4:3 비율은 위아래 공간 확보에 유리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미적인 선택과 현실적인 이유가 함께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켈리 라이카트는 세트 촬영을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장소에서 찍은 오리건의 숲과 강변, 그리고 이 4:3 화면이 만나면서 영화 전체가 마치 낡은 사진첩을 넘기는 것 같은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 "인간에게는 우정"
영화 첫 자막에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구가 등장합니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집, 인간에게는 우정." 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때 저는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이 구조라면 인간에게는 집이 와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거기 '우정'이 들어갑니다. 감독은 이 문장을 통해 우정이 곧 인간의 집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영화 전체가 다르게 읽힙니다. 쿠키가 킹 루에게 텐트를 내어준 것, 킹 루가 쿠키를 오두막으로 데려간 것, 그리고 마지막에 강변의 오목한 땅에 나란히 누운 것. 이 세 장면이 모두 거처를 나누는 장면이고, 그게 곧 우정이 집이 된다는 것을 형식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켈리 라이카트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대안적인 미국 역사 상상이기도 합니다. 총을 들고 인디언을 몰아낸 개척자가 아니라, 요리를 만들고 서로를 먹인 이방인들이 미국의 첫 역사를 썼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뒤집는 게 아니라 지배적인 서사 옆에 다른 가능성을 조용히 놓아두는 방식입니다.
미국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켈리 라이카트는 이른바 '슬로우 시네마(slow cinema)'의 대표 작가로 꼽힙니다. 슬로우 시네마란 사건보다는 인물의 일상과 감정의 흐름을 길고 느린 숏으로 포착하는 영화 스타일을 말하는데, 유럽 예술영화에서 주로 발전해온 방법론입니다. 퍼스트 카우는 그 방법론 위에 미국 서부극이라는 장르 문법을 얹어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출처: BFI).
두 배우 존 마가로와 오리온 리의 연기가 이 영화를 살려냅니다. 특별히 격한 장면 하나 없이, 대화와 표정과 작은 몸짓으로만 두 사람의 우정을 쌓아 올립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기는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퍼스트 카우 개봉 당시 미국 영화비평가협회(AFI)는 이 작품을 2020년 10대 영화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출처: AFI). 잔잔하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영화라는 평가였습니다.
서부극인 줄 알고 시작해서 쿡방에 홀리고, 끝나고 나면 우정에 관해 오래 생각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빠른 전개를 기대하면 초반 30분이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쿠키가 처음으로 꿀 바른 빵을 내미는 장면부터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속도가 꽤 빠릅니다. 켈리 라이카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면 웬디와 루시나 미드나잇 캐서린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퍼스트 카우가 더 깊게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