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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맨 (몰입감, 허망함, 영혼의 전락)

by 주.만.지 2026. 6. 23.

 

3시간 30분짜리 영화를 중간에 끊지 못하고 끝까지 봤습니다. 오줌도 참으면서요. 저한테 그게 명작의 기준입니다. 아이리시맨은 그 기준을 가볍게 통과했습니다.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진짜 인생 진짜 허망하네."

3시간 반을 버티게 만드는 몰입감의 정체

솔직히 처음엔 걱정했습니다. 3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도전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까 이상하게 끊기가 싫더라고요. 명작들에는 공통적으로 이런 게 있습니다. 연출의 호흡이 뭔가 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집중력이 유지되는 느낌. 대사가 좋거나, 화면이 좋거나, 궁금증이 계속 생기거나. 아이리시맨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씁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프랭크 시런이 오랜 친구이자 보스인 지미 호파를 살해하러 가는 시퀀스는 정말 서늘했습니다. 여기서 시퀀스(sequence)란 하나의 극적 단위를 이루는 연속된 장면들의 묶음을 뜻하는 영화 용어입니다. 이 장면에서 스콜세지는 음악도 없고, 극적인 대사도 없고, 긴장감을 인위적으로 올리는 음향 효과도 없습니다. 그냥 건조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데, 이런 연출은 관객이 스스로 공백을 채우게 만들거든요. 그 과정에서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영화는 또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기법을 독특하게 활용합니다. 프리즈 프레임이란 화면의 특정 순간을 정지시켜 마치 사진처럼 고정하는 편집 기술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이 처음 나오는 순간, 화면을 멈추고 그 인물이 나중에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자막으로 바로 알려줍니다. 지금 막 누군가를 죽이고 있는 사람이 몇 년 뒤 똑같이 비참하게 죽는다는 걸 미리 알고 보는 거죠. 이 연출 하나가 영화 전체의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완성합니다.

미국 현대사의 허망함, 잘나가다 x되는 이야기

아이리시맨이 다루는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입니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전미 트럭 운수 노조(IBT, 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극도로 강성해져 있었습니다. IBT는 당시 미국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으로, 그 위원장인 지미 호파는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만큼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애들 다 한가닥 하는 인간들인데, 결국 다 좆되네." 노조 위원장이든, 마피아 보스든, 정치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이권 다툼의 끝은 결국 살인이고, 살인의 끝은 감옥이거나 암살입니다. 미국 사회가 그냥 만만하지 않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영화의 삼각 구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지미 호파: 전미 트럭 운수 노조의 위원장. 마피아와 결탁하며 노동운동의 정점에 선 인물
  • 러셀 버팔리노: 이탈리아계 마피아 보스. 냉철하고 실용적이며, 사람을 정확하게 꿰뚫어 봄
  • 프랭크 시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아일랜드계 하청 킬러. 아웃사이더이자 2인자

이 구도에서 스콜세지가 주인공으로 선택한 건 호파도 러셀도 아닌 프랭크 시런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프랭크는 스스로 생각해서 악을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났고, 마침 러셀을 만났고, 마침 소고기를 싣고 있었고, 마침 기회가 생겼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물었을 뿐입니다. 폴 부르제라는 프랑스 작가의 말처럼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문장이 이 인물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전미 트럭 운수 노조의 역사와 지미 호파 실종 사건에 대한 자세한 배경은 미국 노동부의 공식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미국 노동부).

영혼의 전락, 그 정확한 순간

이 영화에서 저한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호파를 죽이는 장면이 아닙니다. 죽이고 나서 호파의 부인에게 위로 전화를 거는 장면입니다.

영화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회고 형식으로 설계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과 순서를 뜻합니다. 이 영화는 노인이 된 프랭크 시런이 요양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체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구조 덕분에 우리는 처음부터 그가 살아남는다는 걸 알고, 그것이 오히려 비극처럼 느껴집니다.

호파를 죽인 그 밤, 프랭크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합니다. 영화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살았던 사람이, 최초로 멈칫합니다. 그러나 이미 쌓아온 악행의 무게가 그를 되돌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죽인 뒤에 그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거짓 위로를 하는 순간, 이 사람의 영혼은 그걸로 끝납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그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연기하는데, 정말 명연기입니다. 그 얼굴 하나로 다 설명이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잊히지 않습니다. 요양원에서 신부가 나가면서 문을 살짝 열어 두는 걸 부탁하는 프랭크. 죽으면서도 완전히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문을 조금 열어 둔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 문틈만큼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은 겁니다.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를 영화는 끝까지 답해 주지 않습니다. 그게 더 잔인합니다.

갱스터 영화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이 이렇게 정교하게 쓰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 즉 조명, 배우의 위치, 세트, 색감 등을 연출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스콜세지는 이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씁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탄복했습니다.

영화와 관련된 실제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의 공식 수사 기록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일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출처: FBI 공식 사이트).

아이리시맨은 대부처럼 비정한 영화는 아닙니다. 대신 훨씬 더 애처롭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스콜세지가 노년에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젊은 시절의 에너지와 분노 대신, 살아남은 자의 허망함이 영화 전체에 배어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니 시간 날 때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단, 3시간 30분 각오하고 앉으세요. 중간에 끊으면 손해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4ZXWmhbaD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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