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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리뷰 (연기, 고레에다, 여운)

by 주.만.지 2026. 6. 1.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까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기작들을 워낙 높게 쳐두고 있던 터라, 최근 작품들은 조금 평이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트나인 스크린 앞에 앉아서 영화가 끝났을 때, 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외 연립주택단지, 그리고 태풍이 만들어낸 정서

혹시 어린 시절에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을 기억하십니까? 전날까지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과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세상 전체가 쓸려나간 듯 조용해지던 그 적막감 말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감각을 스크린 위에 옮겨놓으려 한 작품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홉 살부터 20년간 살았던 실제 연립주택단지를 직접 찾아가 촬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카메라가 잡아내는 공간감이 남다릅니다. 이 영화에서 공간의 밀도감, 즉 좁은 복도와 낡은 계단, 단지 안 놀이터 같은 소소한 배경들이 단순한 세트가 아니라 살아있는 기억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여기서 '공간의 밀도감'이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물리적 환경으로 표현하는 영화적 연출 방식을 의미합니다. 고레에다의 작품에서 이 기법은 특히 두드러지는데, 좁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이혼 가족의 1박 2일은 그 공간이 주는 압박감 자체가 드라마가 됩니다.

교외 연립주택단지에 대한 어떤 추억이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서인지, 초반부터 화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배우들이 만들어낸 연기의 앙상블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주목한 건 사실 아베 히로시보다 이케마치 소스케였습니다. 저만 이상하게 느낀 걸까요?

이케마치 소스케가 연기하는 아이 신고는 약간 생글거리는 얼굴에 어른스러운 여유가 배어 있는 캐릭터입니다.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츠마부키 사토시가 떠올랐습니다. 이 아이처럼 카메라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꾸밈없이 존재하는 연기를 '내추럴 액팅(Natural Acting)'이라 부릅니다. 내추럴 액팅이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실제 인물처럼 보이게 하는 연기 스타일로, 관객이 극의 흐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케마치 소스케는 그걸 그냥 해냈습니다. 스크린에서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아베 히로시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89cm의 장신이라는 사실이 영화 내내 잊혀질 만큼, 그는 철저하게 쭈구리 같은 존재감으로 화면을 채웁니다. 전철역에서 식사하는 첫 장면부터 단지 안에서 떡을 먹으며 손을 핥는 장면까지, 이 남자가 얼마나 자잘하게 찌질한지를 보여주는 디테일이 촘촘합니다.

마키 요코가 연기하는 전처 쿄코는 어떻습니까?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현명한 이혼녀' 역할을 그는 정확하게 소화해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마키 요코의 연기가 '평이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극도로 절제된 감정 표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화면 속 마키 요코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는 것도 인정해야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연기력이 돋보이는 배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키키 키린: 변변치 못한 아들을 안쓰러워하면서도 손자와 며느리를 향한 따뜻함을 동시에 품어낸 연기. 특히 결말부에서 손자와 나누는 장면은 저도 한 번 울컥할 뻔했습니다.
  • 아베 히로시: 장신의 신체를 완전히 지워버린, 찌질함의 정수를 보여준 캐릭터 연기.
  • 마키 요코: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쿄코라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구축한 배우.
  • 이케마치 소스케: 어린 나이에 내추럴 액팅을 구현해 스크린에 생동감을 불어넣은 아역 배우.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 작품에 다섯 번째 출연한 배우입니다. 감독이 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키키 키린이 출연하지 않으면 제작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후일담은,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꿈과 현실의 간극, 이 영화가 건드리는 것

혹시 어릴 때 꿈꿨던 어른의 모습이 지금의 자신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 영화의 시나리오 첫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료타는 소설가로 데뷔한 뒤 재기를 꿈꾸며 사설탐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떠오릅니다. 캐릭터 아크란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나타내는 서사 구조로, 료타의 경우 그 아크가 극적인 성장이나 반전이 아닌 아주 작은 마음의 정리로 귀결되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입니다.

도박과 사기에 가까운 행동들, 아들 글러브 살 돈조차 탕진해버리는 무능함. 이런 인물이 관객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건, 그가 단순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인물들 각자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설정을 엄마에게까지 적용합니다. 40년을 이 좁은 집에서 살게 될 줄 몰랐다는 대사 한 마디가, 사실 관객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영화 연구자들은 고레에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할 때 오즈 야스지로보다 나루세 미키오와의 유사성을 자주 언급합니다. 나루세 미키오는 20세기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인물들을 이상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인간의 약함과 모순을 그대로 담아내는 리얼리즘적 연출로 유명합니다(출처: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이 영화에서 모든 인물이 마냥 착하지 않다는 점, 예를 들어 흥신소 대표가 고객에게 청구서를 부풀리고 착한 후배가 선배를 슬쩍 속이는 장면들이 바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하나레구미가 부르는 엔드 크레딧 곡 '깊은 숨'도 이 영화의 여운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저는 하나레구미 팬이라 그 노래가 나오는 순간 괜히 더 뭉클했습니다. 일본 인디 음악 씬에서 하나레구미는 나카하라 쥰페이의 솔로 프로젝트로, 섬세하고 담백한 음색이 특징입니다(출처: 하나레구미 공식 사이트).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말고 그 노래를 끝까지 들으시길 권합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보는 사람에 따라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사건 중심의 서사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공간, 그리고 아주 작은 대화들이 켜켜이 쌓이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번 그 흐름에 올라타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했으니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고레에다의 최근작이 초기작보다 친절하고 따뜻하다고 느끼는 분이라면, 이 영화는 그 방향성의 정점에 가까운 작품일 것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오늘 밤 한번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VgmJ5QHk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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