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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리뷰 (뺄셈의 미학, 익명성, 비선형 구조)

by 주.만.지 2026. 6. 1.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뭐야 이거' 하고 끝냈습니다. 딴생각을 하면서 본 탓도 있었지만, 전쟁 영화치고 전투가 너무 없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인지 알게 된 뒤에는, 멍하니 다시 첫 장면부터 떠올리게 됐습니다.

뺄셈의 미학, 없애서 만든 영화

대부분의 전쟁 영화는 적군과 아군의 대결 구도를 중심으로 극적 긴장감을 쌓아 올립니다. 덩케르크는 정반대의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독일군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파일럿을 체포하러 오는 병사들이 희미하게 나오는 게 전부입니다. 전투 장면도 공중전 몇 개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하고, 주인공들의 전사(前史), 즉 고향에 누가 있는지, 약혼녀가 있는지, 병든 부모가 있는지조차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선택이 처음에는 불친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도 감정 이입할 고리가 마땅치 않아서 주인공이 죽을 위기에 처해도 조마조마함이 덜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의도된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이해했습니다. 전사가 없으면 관객은 어느 병사에게도 편향되지 않습니다. 깁슨이 죽어야 할 이유도, 토미가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그들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남죠.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서사 전략입니다. 캐릭터의 사연을 걷어내고, 모든 생명을 공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영화 평론에서는 이를 '인물의 탈개인화'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탈개인화란 특정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보다 인간 전체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덩케르크는 이 기법을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에 적용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익명성이 만드는 역설적 감동

이 영화에는 이름을 쓰는 방식에 묘한 규칙이 있습니다. 살아 돌아가야 하는 병사들은 이름이 없거나, 있어도 영화 안에서 한 번도 불리지 않습니다. 반면 그들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 민간 어선의 선장 도슨, 그의 아들 피터, 어선에 함께 탄 조지, 공군 파일럿 파리어와 콜린스, 해군 제독 볼튼은 모두 이름이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알고 나서 다시 영화를 떠올렸을 때 꽤 소름이 돋았습니다. 영화가 기억하는 영웅은 공중전에서 맹활약한 파리어도, 끝까지 지휘를 이어간 볼튼도 아닙니다. 신문 기사로 이름이 실린 영웅은 배리 키오건이 연기한 열일곱 살 소년 조지입니다. 제대로 한 일도 없고, 어선에 초대받지도 않았던 그 아이가 공식적인 영웅이 됩니다.

이 역설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전공(戰功)을 세운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쓰러져 간 모든 사람이 영웅이라는 것. 익명성(匿名性)이란 단순히 이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 영화에서는 그 시대를 살아낸 수십만 명 전체를 대표하는 기호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토미라는 인물 이름을 영화 끝 크레딧에서야 알게 된다는 설정이, 단순한 연출 선택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테마를 완성하는 장치인 겁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1940년 5월부터 6월까지 약 2주간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총 338,000명 이상의 연합군 병사가 구출되었습니다(출처: 영국 국립기록원(The National Archives)). 그 숫자 뒤에 있는 이름 없는 얼굴들이 바로 이 영화가 기억하려는 존재들입니다.

비선형 구조, 헷갈리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시간대가 왜 이렇게 뒤섞여 있어?" 하고 불편했던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는 혼란을 주려는 게 아니라 각 공간의 감정적 질감을 다르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영화는 세 개의 시간 축으로 나뉩니다.

  • 육지(잔교): 1주일
  • 바다(민간 어선): 1일
  • 하늘(스핏파이어 공중전): 1시간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지 않고, 각 파트의 감정적 밀도에 맞게 재배열하는 서술 방식입니다. 이 기법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인셉션에서도 꿈의 층위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방식으로 이미 구현된 바 있습니다.

육지에서는 구원의 손길이 너무 늦게 오기 때문에 시간이 질질 끌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늘에서는 연료가 바닥나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모자랍니다. 같은 작전의 일부인데도 각자의 절박함이 완전히 다른 것이죠. 이 구조 덕분에 관객은 세 공간에서 동시에 고립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의 구출 작전을 보고 있지만, 세 개의 다른 전쟁을 경험하는 셈입니다.

제 경험상 이 구조는 극장에서 봤을 때 훨씬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저는 집에서 딴생각하면서 봐서 큰 그림만 겨우 잡았는데, 재개봉 때 큰 스크린으로 봤다면 훨씬 다른 영화로 느꼈을 것 같습니다. 사운드와 화면의 압도감이 이 구조적 긴장감을 물리적으로 전달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출처: British Film Institute(BFI)).

Z축 폭격, 관객을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연출

이 영화를 단순히 "몰입감 있는 전쟁 영화"라고 설명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몰입감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관객이 구경꾼이 되기도 하고, 당사자가 되기도 하거든요.

폭격 장면에서 놀란은 좌우(X축)가 아닌 화면 깊이 방향(Z축)을 따라 폭탄이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연출합니다. Z축 연출이란 화면 안쪽에서 카메라 방향, 즉 관객 쪽으로 사건이 진행되도록 구성하는 촬영 방식을 말합니다. 좌우로 펼쳐지는 액션은 관객을 안전한 구경꾼 자리에 앉혀 두지만, Z축으로 다가오는 액션은 그 경계를 허뭅니다.

해변에 납작 엎드린 토미 뒤로 폭탄이 하나씩 가까워질 때, 마지막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구도는 다음 한 발이 터지면 그것이 스크린 너머까지 도달할 것처럼 느껴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관객도 함께 엎드리게 되는 구도입니다. 이런 카메라 앵글 선택이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관객을 익명의 병사 중 한 명으로 편입시키는 장치라는 점에서 영리한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톰 하디가 연기한 파리어의 공중전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의 주력 단좌 전투기로, 높은 기동성과 상승률로 독일 공군의 메서슈미트 Bf 109와 맞붙었던 기체입니다. 화면 가득 채우는 조종석 안에서 연료 게이지가 바닥을 향하는 장면은 아무 설명 없이도 긴박함을 전달했고,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이 상공 1시간의 파트를 가장 인상적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결국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가 보여줘야 한다"는 관습을 하나하나 걷어내면서 오히려 더 강한 감정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만큼 박진감이 있고, 생각하면서 보면 설계의 정교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처음에 '뭐야 이거'라고 끝냈던 저처럼 첫 번째 관람이 아쉬웠던 분이 있다면, 두 번째는 구조를 의식하면서 보시길 권합니다. 영화가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QxnNuQ9p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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