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PTA 영화를 처음 접한 게 '마스터'였는데, 그 영화가 얼마나 난해하던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한참 애껴뒀습니다. 막상 보니까 '마스터'보다 훨씬 친절한 구조였고, 두 시간 반이 어느 순간 지나 있었습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가 화면을 지배하는 방식, 폴 다노의 광기 어린 신경전, 그리고 영화 밑에 깔린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까지. 이 영화가 왜 21세기 최고작 목록 상단에 올라오는지, 보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가 됐습니다.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간을 해부하는 캐릭터 스터디
캐릭터 스터디(character study)란 한 인물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하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방식으로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인간을 해부합니다. 1898년부터 1927년까지 30년, 딱 한 세대를 담은 이 이야기에서 그는 석유 채굴자에서 시작해 거대한 제국을 세운 자본가로 변해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은 유정에서 가스가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아들이 그 충격으로 청각장애를 입었는데, 이 남자는 아들을 식당에 눕혀두고 다시 유정으로 달려갑니다. 달려가서 한 건 뒤처리가 아니라 구경이었습니다. 석유가 솟구치는 광경에 환희에 젖어 있는 거죠. 직원이 아들 안 보러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 대신 "이 석유는 오로지 내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 장면이 이 인물의 파우스트적 전락,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보루를 스스로 허무는 순간이라고 저는 봤습니다.
소시오패스(sociopath)라는 말을 쓸 수 있을 텐데, 이는 공감 능력 결핍과 반사회적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 유형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를 단순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헨리라는 가짜 이복형제가 찾아왔을 때, 이 남자가 보여준 유일한 웃음과 유일한 눈물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두 장면 모두 헨리와 연관돼 있습니다. 그렇게 외로운 인간이었던 거죠.
다니엘과 아들 H.W.의 관계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동업자로 봤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봤습니다. 이 비틀린 인식의 차이가 결국 마지막에 "너는 bastard다"라는 선언으로 폭발합니다. 1927년 시퀀스에서 아들이 멕시코로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동업자가 이탈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애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 계산의 문제였던 겁니다.
이 영화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보여주는 연기는 당대 할리우드 퍼포먼스의 정점에 해당한다고 평가받습니다. 세례식 장면에서 "I've abandoned my boy"를 외치는 클로즈업, 볼링장에서 일라이를 몰아붙이는 마지막 시퀀스는 배우가 캐릭터를 완전히 소화했을 때만 가능한 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극장이 아닌 TV 화면으로 봤음에도 그 장면들에서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연기 구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니엘 데이 루이스: 세 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기록 중 이 영화로 한 번 수상. 50세의 나이에 촬영
- 폴 다노: 촬영 당시 23세. 갑작스럽게 일라이 역까지 1인 2역으로 맡아 촬영 며칠 만에 현장 투입
- H.W. 역의 아역 배우 딜런 프레스너: 청각장애 연기를 포함한 감정선을 안정적으로 소화
미국 자본주의를 향한 거시적 시선
이 영화가 단순한 인물극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다니엘 플레인뷰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20세기 초반 미국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봅니다. 영화가 1898년에 시작해 1927년에 끝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1893년 대공황 직후에서 출발해 1929년 대공황 직전에 끝나는 시간표는, 두 번의 경제 붕괴 사이에서 자본이 어떻게 팽창했는지를 한 인물의 일생으로 압축한 구조입니다.
내러티브 알레고리(narrative allegory)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이는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서사 방식입니다. 이 영화에서 석유와 피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겹치는 것, 헨리를 땅에 묻는 장면과 송유관을 땅에 까는 장면이 나란히 배치되는 것, 이 모든 게 이 기법의 실천입니다. 자본주의의 성공 아래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깔려 있다는 냉정한 시선이죠.
다니엘과 일라이의 대립 구도도 처음엔 자본 대 종교의 싸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게 아닙니다. 일라이는 종교를 도구로 삼은 사업가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뜻"이라며 싼값에 땅을 넘겼다고 멱살을 잡고, 교회 건립 비용을 위해 5,000달러 보너스를 요구하고, 나중엔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 다니엘을 찾아와 구걸합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종교와 자본의 대립이 아니라 두 자본가의 사업 전쟁이었던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니엘은 일라이에게 "I'm the third revelation(나는 세 번째 계시다)"라고 선언합니다. 영화 내내 일라이가 자기 교단 이름으로 썼던 말을 빼앗아 쓰는 거죠. 이 선언은 단순한 승리 선언이 아닙니다. 가족주의라는 가면도, 기독교라는 가면도 이제 필요 없다는 자본의 자기 선언입니다.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다 벗어버린 자본이 적나라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영화의 시각적 설계도 이 주제를 받쳐줍니다. 물과 불의 이미지가 영화 전체에 걸쳐 대비됩니다. 메리는 처음 등장할 때 H.W.에게 물을 가져다 주고, 결혼식 주례사도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반면 일라이는 처음 등장할 때 땔감, 즉 불을 가져오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불이 났어요"라고 다니엘을 깨웁니다. 저는 이 물과 불의 배치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 의미가 하나로 모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영화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미국 자본주의의 비판적 재현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실제로 업튼 싱클레어의 원작 소설 'Oil!'이 석유 산업과 계급 착취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비판 소설이었다는 점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 원작의 비판 의식을 계승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출처: 미국영화연구소 AFI).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로서 처음 맡은 영화음악이었는데, 듣기 편한 음악이 아니라 불안과 예측 불가능함을 의도적으로 구현한 불협화음 기반의 음악이 이 영화의 분위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한 건 아쉬운 대목입니다(출처: 아카데미 시상식 공식 기록).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 왜 지금까지 아카데미 감독상을 한 번도 못 받았는지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팬텀 스레드. 이 세 편만 놓고 봐도 감독상 세 번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은 필모그래피입니다. 그 연기 신 같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앞에서 23살의 폴 다노가 눌리지 않는 연기를 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아직 보지 않은 매그놀리아를 꺼내는 타이밍을 좀 더 늦춰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