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휴민트 리뷰 (장르적 긴장감, 캐릭터 모티브, 류승완)

by 주.만.지 2026. 5. 19.

 

230억 원이 투입된 영화가 누적 관객 200만 명에 그쳤습니다. 저는 베테랑2 이후 류승완 감독에 대한 기대를 많이 내려놓은 상태여서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했는데, 다 보고 나서 솔직히 후회했습니다. 후반부 총기 액션만큼은 극장 스크린으로 봤어야 했습니다.

장르적 긴장감을 스스로 포기한 영화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 기법입니다. 여기서 휴민트란 단순히 정보를 캐낸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철저히 이용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냉혹한 시스템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 단어를 제목으로 내건 영화라면, 당연히 그 불편함을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인성이 연기한 조 과장은 처음 장면부터 최선화를 진심으로 대합니다. 정보원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도 그녀를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보고, 목숨을 걸고 구하러 갑니다. 첩보 장르에서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건 사실 장르의 핵심 긴장을 스스로 해체하는 선택입니다. 공각기동대나 류승완 감독 본인의 베를린을 떠올려보면, 스파이는 영웅이 아닙니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외롭고 더러운 존재였죠.

제가 초중반을 보면서 이게 왜 재미없다고 했을까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던 건 사실입니다. 남한-북한 간 첩보전, 북한 조직 내 알력 싸움이 꽤 디테일하게 그려졌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뭔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모든 도덕적 오염을 황치성 총영사 한 명에게 집중시켜 버리면 주인공은 깨끗해지고, 영화는 편안해지지만, 동시에 공허해집니다.

캐릭터 모티브의 구조적 허점

박정민이 연기한 박건은 처음 등장 장면부터 카리스마가 넘쳤습니다. 솔직히 저도 첫인상은 꽤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 캐릭터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가 눈에 걸렸습니다.

북한 국가보위성은 체제 유지를 위해 자국민을 감시하고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기관입니다. 탈북민 증언과 북한인권 연구 자료들을 보면, 이 조직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체제를 이탈하는 건 단순한 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출처: 북한인권정보센터). 세뇌와 충성이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사람이 그걸 벗어던지는 건 엄청난 심리적 무게를 동반합니다.

그런데 박건은 너무 합리적입니다. 자신이 몸담은 체제에 의문을 품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시스템을 이탈하고, 결국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 감정의 흐름 자체는 이해가 됩니다.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그 감정을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문제는 연기가 아니라 시나리오가 그 캐릭터에게 구조적 무게를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가 박건의 내면을 진지하게 다루려 했다면, 다음 중 하나는 필요했다고 봅니다.

  • 박건이 보위성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해왔는지 보여주는 장면
  • 사랑만으로 체제를 버리기에는 부족할 만큼 깊이 있는 내적 갈등 묘사
  • 탈이념화(de-ideologization) 과정, 즉 세뇌된 신념 체계가 무너지는 심리적 과정의 묘사

여기서 탈이념화란 오랜 시간 주입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점차 해체되는 심리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북한 이탈 주민을 다룬 진지한 작품들에서 이 과정은 항상 무겁고 고통스럽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휴민트는 그 무게를 생략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여기에 대입해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거대한 악은 괴물 같은 악인이 저지르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시스템 안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순응할 때 발생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정반대로 갑니다. 박건을 순수한 개인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가 시스템 안에서 해온 모든 행동을 지워버립니다.

류승완 감독의 분노는 어디로 갔나

부당거래는 권력의 부패에 분노했습니다. 베테랑은 갑질과 계급 문제에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가 선명했기 때문에 에너지가 됐고, 관객을 끌어당겼습니다. 그렇다면 휴민트는 무엇에 분노하는 걸까요.

인신매매에 분노하는 건지, 북한 체제에 분노하는 건지, 정보 기관의 냉혹함에 분노하는 건지.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분노하려다 보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폭발하지 못하고 전부 미지근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지점이 바로 이겁니다.

류승완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완성도만 놓고 보면 이번 영화는 마음껏 해본 느낌이다"라고 말한 게 기억에 남습니다. 장인적 욕심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것과, 분노를 담아 관객을 뒤흔드는 것은 서로 다른 목표입니다.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은 전자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측면에서도 이 충돌이 보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구도, 배우의 움직임, 세트 등을 통해 감독이 의도를 표현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스플릿 디옵터(split diopter, 화면의 가까운 피사체와 먼 피사체를 동시에 선명하게 잡는 렌즈 기법)나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특정 장면을 정지시켜 강조하는 편집 기법) 등은 냉전 시대 스파이 영화에서 온 감성입니다. 그런데 2026년 현대 첩보전을 다루는 이야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폼과 내용이 어긋나면 관객은 이유를 모르면서도 뭔가 올드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한국 영화 전문 연구 기관의 관객 만족도 조사에서도 장르 영화의 흥행 실패 원인 1위로 "기대와 실제 내용의 괴리"가 꾸준히 꼽히고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휴민트라는 제목이 만들어낸 기대와, 실제 영화가 제공한 감동 사이의 간극이 정확히 그 문제였다고 봅니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기억납니다. 잘 만들었고 배우들 연기도 좋았는데, 묘하게 아쉬웠습니다. 조인성, 박정민, 신세경 모두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악역을 맡은 박해준도 능글맞게 상당히 잘 소화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뭔가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200만 관객이 들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500만이 넘을 영화도 아니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베테랑2로 바닥까지 내려갔던 기대치가 휴민트를 보고 나서는 다시 조금 올라왔습니다. 류승완 감독이 다시 선명한 분노를 들고 돌아오는 날, 그 영화는 볼 만할 것입니다. 차기작을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hPqTBwJZsY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