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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배우 연기, 미장센, PTA 감독)

by 주.만.지 2026. 5. 16.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고편 봤을 때만 해도 그냥 스타 배우들 잔뜩 모아놓은 오락 영화겠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극장에서 보고 나오니까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랄까요. PTA, 즉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2024년 골든글로브 4관왕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보고 2회차까지 챙겨봤는데, 볼수록 뭔가 더 보이는 영화였습니다.

배우 연기: 숀 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리고 나머지들

이 영화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아십니까? "GTA를 영화로 만들면 이런 느낌 아닐까?" 였습니다. 초반부터 도파민을 끊임없이 분비시키는 속도감이 있는데, 그게 억지스럽지 않고 배우들 연기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옵니다.

숀 펜 얘기를 먼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숀 펜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 역할은 솔직히 경악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순혈 상류층의 명예욕을 쫓는 백인우월주의자, 거기에 군인 특유의 호모포비아까지 한 캐릭터 안에 쑤셔 넣었는데, 그걸 매스껍도록 자연스럽게 소화하더군요. 특히 피범벅이 된 채 걸어 나오는 장면은 터미네이터가 연상될 정도였고, 입술 연기 하나하나가 인상에 남았습니다.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카리스마 있게 하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속 더럽고 변태적인 역할을 관객이 눈을 못 떼게 하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또 어떻습니까. 로미오와 줄리엣 시절의 그 덜떨어진 슬랩스틱 연기, 기억하시는 분들 있으시죠? 그 에너지에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의 또라이 캐릭터 DNA를 섞고, 거기에 딸바보 아빠 감성까지 더했는데 이게 이상하게 매력 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평생 20대 백인 여자만 곁에 두고 살아온 남자에게서 그 눈빛이 나오는 게 신기했습니다. 키워본 적도 없는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짜라는 게 느껴지거든요. 엔딩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이프가 돌아와서 싹 쓸어버리는 흔한 결말 대신 편지 하나로 마무리한 선택, 처음엔 싱거웠는데 곱씹으면 속죄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어서 오히려 잘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이번 영화에서 제 눈에 들어온 배우 포인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숀 펜: 백인우월주의 + 호모포비아 + 명예욕 집약체. 조연상 경쟁 상대가 없어 보입니다.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슬랩스틱과 딸바보의 이질적인 조합이 설득력 있게 작동합니다.
  • 베니시오 델 토로: 솔직히 우정 출연 느낌이 강했고, 배역 자체의 매력도 아쉬웠습니다.
  • 체이스 인피니티: 이번 영화에서 가장 의외의 존재감. 진짜 매력이 터지더군요.

베니시오 델 토로는 아쉬웠습니다. 셀카 찍고 일부러 맥주 마시는 장면에서 배신 캐릭터인가 잔뜩 의심했는데, 결국 탈출을 돕는 단순한 열쇠 역할로 끝나버려서 살짝 김이 빠졌습니다. 배역 자체가 매력이 별로 없었던 탓이 크다고 봅니다.

미장센과 PTA 감독의 작가주의: 왜 이 영화가 특별한가

2회차를 보고 나서 진지하게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지? 라는 거였습니다. 칭찬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세트, 의상, 색채를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연출 개념입니다. PTA 감독은 바로 이 미장센을 통해서 텍스트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이미지로 전달하는 데 탁월합니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였는데, 화면 자체가 품고 있는 정보량이 상당합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 팬텀 스레드 등을 통해 이른바 작가주의(auteurism)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입니다. 작가주의란 감독을 단순한 연출자가 아닌 영화의 저자(author)로 보는 시각인데, 쉽게 말해 감독의 철학과 미학이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관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극도로 세련된 화면 언어로 풀어내는 특유의 방식이 있습니다. 팬텀 스레드에서 50년대 런던을 화려함 없이 절제된 미장센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이번 작품도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장르에서 그 절제가 빛납니다.

블랙 코미디란 죽음, 폭력, 사회적 불평등처럼 어둡고 불편한 소재를 웃음으로 포장해 비판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이 장르의 어려움은 웃음과 불쾌함 사이의 균형인데, 이 영화는 그 줄 타기를 꽤 성공적으로 해냅니다. 인종 문제, 이민자 서사, 미국 사회의 계층 구조를 다루면서도 지루할 틈이 없고, 선곡마저 좋아서 러닝타임이 길다는 사실을 한참 지나서야 인식하게 됩니다.

다만 러닝타임이 길다는 건 누군가에겐 분명한 패널티입니다. 장편 극영화의 평균 러닝타임이 약 100~110분임을 감안할 때(출처: 미국 영화 협회 AFI), 이 영화는 그보다 상당히 긴 편입니다. 극장에서 집중력을 유지할 자신이 없는 분들은 미리 각오하고 가시는 게 좋습니다.

한 가지 더,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인 논선형 편집(non-linear editing) 방식도 눈여겨볼 지점입니다. 논선형 편집이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장면을 배치하는 편집 기법으로, 관객이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조립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PTA 감독이 매그놀리아에서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한 순간에 파팍 맞춰냈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그 편집의 감각이 살아있습니다. 영화 전문 매체 기준으로도 이 작품의 편집과 각본 완성도는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출처: 로튼 토마토).

제가 직접 2회차까지 챙겨봤는데, 두 번째 볼 때는 처음에 그냥 웃고 넘어갔던 장면들이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코미디이면서 사회 비판이고, 액션이면서 가족 드라마이고, 오락 영화이면서 작가주의 작품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 편 안에서 빡빡하게 꽂히는 경험이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극장에서 보길 진심으로 권합니다. 집 스크린으로는 이 화면의 밀도가 반쯤 날아갑니다. 혹시 아직 못 보셨다면, 이번 주말 극장 스케줄 한번 확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qwxY5rde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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