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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기생충 수준의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 신작이라는 말 하나만으로 이미 머릿속에 기준치가 올라가 있었거든요. 근데 그 기대치 세팅 자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미키 17은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설정, 듣기만 해도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배경은 2054년입니다.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예요. 이 시대에는 우주 개척선(Space Pioneer Vessel)을 통해 새로운 행성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여기서 '우주 개척선'이란 인류가 새로운 정착지를 확보하기 위해 우주로 파견하는 이민 우주선을 말합니다. 그 안에 익스팬더블(Expendable)이라는 포지션이 있습니다.
익스팬더블이란 한마디로 소모품 인간입니다. 자신의 기억과 신체 데이터를 시스템에 저장해두고, 죽으면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프린팅(Re-printing)되어 다시 살아나는 역할입니다. 여기서 재프린팅이란 저장된 생체 데이터를 토대로 인체를 다시 생성하는 기술을 뜻합니다. 죽을 때마다 번호가 붙습니다. 미키 1, 미키 2, 이렇게 해서 미키 17까지 온 거예요.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사채업자를 피해 도망치듯 이 개척선에 탑승한 인물입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경쟁률이 낮은 익스팬더블에 지원했는데, 사실 지원서도 제대로 안 읽었다고 합니다. 이 설정이 이미 이 영화의 톤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제가 직접 보면서 꽤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무거운 SF 세계관인데 주인공의 동기가 이렇게 찌질하다니요.
이 영화를 SF 장르(Science Fiction)로만 분류하면 좀 억울합니다. SF란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픽션 장르를 의미하지만, 미키 17은 그 안에 블랙 코미디와 로맨스, 계급 풍자까지 꽉꽉 눌러 담았습니다. 영화 등급은 15세 관람가이며 상영 시간은 137분입니다.
- 배경: 2054년, 우주 행성 개척 시대
- 핵심 설정: 익스팬더블 — 죽어도 재프린팅으로 부활하는 소모품 인간
- 주인공 미키 17: 로버트 패틴슨이 1인 2역에 가까운 연기를 소화
- 우주선 사령관 마샬 역: 마크 러팔로, 독재자 캐릭터로 강렬한 인상
- 장르 혼합: SF + 블랙 코미디 + 로맨스 + 계급 풍자
블랙코미디로 버무린 덕분에 잔인한 이야기가 불편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바로 톤의 선택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주인공이 실험체 취급을 받으며 반복적으로 죽습니다.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위험한 행성 밖으로 내보내지고, 주변 사람들은 '어차피 내일 다시 태어나잖아'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대합니다. 이걸 음침하고 무겁게 찍었다면 꽤 불편한 영화가 됐을 겁니다.
봉준호 감독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패틴슨의 내레이션(Narration)이 이 영화의 결정적인 무기입니다. 내레이션이란 영상 위에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 연출 기법인데, 미키 17에서 이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자조적이고 푸념 섞인 투로 진행됩니다. 잔인한 장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미키가 혼자 구시렁거리는 방식이라, 저는 보는 내내 긴장보다는 실소가 먼저 나왔습니다.
블랙 코미디(Black Comedy)란 죽음이나 고통처럼 어두운 소재를 유머의 재료로 삼는 장르 기법입니다. 미키 17은 그 정의에 꽤 충실합니다. 멀티플(Multiple)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순간부터 영화가 한층 더 흥미로워지는데, 멀티플이란 동일한 익스팬더블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복제본이 동시에 생성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게 우주에서 엄격히 금지된 상황이라 미키 17과 18이 동시에 살아있게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영화 중후반의 재미를 견인합니다.
마크 러팔로와 그의 아내 역할을 맡은 토니 콜렛의 투샷 연기는 제가 직접 봐서 말씀드리는 건데, 생각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 멍청하고 불같은 독재자 사령관과 그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영부인 캐릭터의 호흡이 기가 막혀서, 이 둘이 나오는 장면마다 집중하게 됐습니다. 봉준호식 계급 풍자(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에서도 봉준호 감독의 계급 풍자적 경향이 일관되게 언급됩니다)가 이 캐릭터들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터집니다.
봉준호를 기준으로 재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냥 영화로 보면 꽤 좋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이 가장 하고 싶은 말입니다. 기생충 이후에 봉준호 감독을 접하는 분들 중에 '이거보다 더 심오한 것', '이거보다 더 완벽한 것'을 기본값으로 세팅하고 극장에 들어오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 접근 방식으로 미키 17을 보면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한 방이 없거든요. 기생충처럼 뒤통수를 꽝 치는 반전이나 텐션의 정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캐스팅, 트레일러, 감독 인터뷰, 제작사의 방향성을 종합해보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재밌는 영화'를 본질로 설정하고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메시지와 철학은 부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섹스와 유혈과 블랙유머가 있는 미래판 지브리'에 가깝습니다. 지브리 특유의 세계관 구축과 생명체에 대한 시선, 그 위에 봉준호식 풍자가 얹혀 있는 구조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한 이후, 봉준호 감독에 대한 기대치가 전 세계적으로 올라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기대치가 오히려 이 영화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되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봉준호 문제가 아니라 관객의 프레임 문제입니다.
옥자와 설국열차를 섞었다는 평도 있고, 옥자보다 못하다는 혹평도 있습니다. 그 의견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반박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설국열차나 옥자보다 이 영화가 훨씬 대중적이고, 입문하기도 쉽다고 봅니다. 무겁게 씹어야 할 필요 없이 그냥 쭉 따라가면 되는 영화입니다. 엔딩에 약간 아리송한 부분이 있긴 한데, 기생충처럼 곱씹으면 읽히는 지점이 있습니다.
- 기생충 같은 반전과 한 방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가능성 있음
- 가볍고 재밌는 SF 블랙 코미디를 원한다면: 강력 추천
- 봉준호 필모그래피 최고점을 원한다면: 그건 기생충이 맞음
- 신선한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움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꽤 재밌게 봤습니다. 특히 미키 17과 18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멀티플 상황, 그리고 미키와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애키)의 로맨스 라인이 예상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언가를 꽝 맞는 느낌은 없지만, 보고 나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영화입니다. 그냥 깔끔하게 마무리됩니다.
미키 17을 보실 예정이라면 딱 하나만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기생충을 기준점에서 내려놓고 들어가세요.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훨씬 잘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