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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가 연출하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주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킬러》, 러닝타임 118분짜리 킬러 영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옆자리 아저씨 하품 소리보다 스크린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힘이었고,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데이빗 핀처라는 이름이 만드는 기대치
《파이트 클럽》, 《세븐》, 《소셜 네트워크》, 《나를 찾아줘》. 데이빗 핀처의 필모그래피를 나열하면 왜 이 영화에 기대가 쏠릴 수밖에 없는지 바로 납득이 됩니다. 제가 직접 이 감독 작품들을 꽤 챙겨 봐왔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르적 쾌감보다 긴장의 밀도를 택하는 연출 스타일이죠.
일반적으로 킬러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총격신(gunfight sequence)을 떠올립니다. 총격신이란 총기를 이용한 전투 장면으로,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클리셰처럼 자리 잡은 연출 방식입니다. 그런데 핀처는 이 관습을 의도적으로 비껴갑니다. 《더 킬러》에는 총격신보다 정적이고 절제된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주연 마이클 패스벤더 역시 이 영화의 설득력을 떠받치는 핵심 축입니다. 《노예 12년》, 《맥베스》, 《스티브 잡스》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이미 검증이 끝났고, 여기서도 대사 없이 눈빛과 몸짓만으로 캐릭터를 채워냅니다. 제 경험상 이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 감독 데이빗 핀처: 《파이트 클럽》, 《세븐》, 《조디악》, 《나를 찾아줘》 등 스릴러 중심 필모그래피
- 주연 마이클 패스벤더: 《노예 12년》, 《맥베스》, 《스티브 잡스》 등 하드캐리형 필모그래피
- 조연 틸다 스윈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옥자》 등에 출연한 국제적 배우
-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 및 배급, 극장 동시 개봉 진행
담백한 연출이 오히려 몰입감을 만드는 역설
영화는 챕터 구조(chapter structure)로 나뉩니다. 챕터 구조란 하나의 서사를 독립된 단락으로 분절해 제시하는 서술 방식으로, 각 챕터가 하나의 타겟 처리 과정을 담습니다. 에필로그 포함 총 7개 챕터. 보다 보면 히트맨 같은 스텔스 게임(stealth game)을 옆에서 구경하는 느낌이 납니다. 스텔스 게임이란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목표를 수행하는 방식의 게임 장르를 말합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각 타겟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부 다릅니다. 청소부로 변장해 건물에 침투하는 장면, 카드키를 복제해 잠입하는 장면 등 매 챕터마다 다른 방법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타겟에게 다가갈 때마다 같은 주문을 속으로 반복합니다. "예측하지 마라, 우변하지 마라, 동정하지 마라." 이 나레이션(narration)이 영화 전체에서 캐릭터를 붙들고 있는 기둥입니다. 나레이션이란 화면 밖에서 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독백 형식을 뜻합니다.
여기서 제가 느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킬러는 독백으로는 완벽한 프로처럼 굴면서, 실제 미션에서는 번번이 삐걱거립니다. 초반 암살 실패 장면이 딱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완벽주의자를 자처하는 킬러가 첫 번째 미션을 망치는 방식이 너무 허무해서, 저는 복수의 동기 자체가 약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게 개그 포인트라면 납득이 되는데, 핀처가 그걸 의도한 건지 불분명합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살인마 잭의 집》과 비교하자면, 두 영화 모두 킬러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구조를 택하지만, 《더 킬러》는 그 철학적 과잉을 덜어내고 훨씬 절제된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쉽게 말해 《살인마 잭의 집》에서 유희를 빼고 효율만 남긴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게 강점이자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출처: Rotten Tomatoes — The Killer (2023)
한 가지 더. 틸다 스윈튼과의 식당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입니다. 짧지만 긴장감의 밀도가 다릅니다. 두 배우가 말보다 침묵으로 대화하는 그 장면, 핀처 스타일의 정수가 거기 있습니다.
핀처 팬에게는 평양냉면, 아닌 사람에게는 그냥 밍밍한 냉면
일반적으로 킬러 영화는 관객에게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제공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감정의 정화, 즉 억눌린 긴장이 폭발하며 해소되는 쾌감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입니다. 《테이큰》처럼 복수가 화끈하게 처리되고, 적들이 시원하게 쓰러지는 방식이 그 전형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정확하게 비껴갑니다.
제 경험상 이건 평양냉면 같은 영화입니다. 처음엔 뭔가 싱겁다 싶은데, 계속 먹다 보면 이게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다가, 결국 다 비워냅니다. 핀처 영화를 꾸준히 봐온 분들이라면 이 절제된 텐션이 반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트 클럽》이나 《나를 찾아줘》에서 느꼈던 그 쪼이는 맛, 즉 서사가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쾌감은 여기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영화 평론 매체 로저 에버트닷컴에서도 이 영화의 냉정하고 절제된 스타일을 핵심 특징으로 짚으면서, 핀처가 의도적으로 장르 관습을 해체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출처: RogerEbert.com — The Killer Review 제가 보기에도 이건 핀처가 못 만든 게 아니라, 팬들과 함께 쉬어가는 방식으로 만든 영화에 가깝습니다. 사회 구조를 킬러의 시선으로 비틀어 보는 데이빗 핀처식 자기계발서라고 하면 어떨까요.
남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핀처를 좋아하거나, 패스벤더의 원맨쇼를 보고 싶거나, 《조디악》처럼 정적인 긴장감을 즐길 수 있는 분들이라면 넷플릭스에서 부담 없이 틀어볼 만합니다. 처음 20분이 좀 지루하게 느껴져도 그냥 버티십시오. 어느 순간 화면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킬러》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다만 핀처 전작들이 만들어놓은 기대치 앞에서 살짝 주눅 드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패스벤더가 프로처럼 독백하고 아마추어처럼 삐걱거리는 그 아이러니를 즐겼고, 스윈튼과의 짧은 대면 장면에서 핀처다움을 느꼈습니다. 넷플릭스 구독 중이시라면 118분짜리 시간 투자는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