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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88년생 감독 브래디 코베가 만든 이 영화는 단순한 건축가 전기물이 아니라, 인간이 무언가를 '짓는다'는 행위 자체가 가진 폭력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3시간 30분짜리 영화인데, 보고 난 뒤 허전함보다 어떤 묵직한 밀도가 오래 남았습니다.
브루탈리즘, 못생긴 게 아니라 '진짜'라는 뜻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브루탈리즘을 '거칠고 투박한 건축 스타일'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 같은 건물을 연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이 사조의 어원은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출발합니다.
브루탈리즘(Brutalism)의 뿌리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 지은 집합 주거 '위니테 다비타시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십 개의 공사 업체가 뒤엉켜 작업하다 보니 콘크리트 표면이 제각각 들쭉날쭉하게 나왔고, 그는 미장으로 덮는 대신 그냥 그 상태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 날것의 콘크리트를 프랑스어로 '베통 브뤼트(béton brut)'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브뤼트'란 가공되지 않은, 치장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민낯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이게 영화 제목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영화 속 건축가 라슬로 토스의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전쟁의 상처, 이민자로서의 굴욕, 약물 중독. 메이크업 하나 없이 긁히고 찌그러진 채로 서 있는 콘크리트처럼, 이 인물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라슬로가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만들어 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make'가 아니라 'construct'라는 단어를 쓰는 장면이 있는데, 이 디테일이 저한테는 꽤 오래 남았습니다. 컨스트럭트(construct)란 단순히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요소를 짜 맞춰 전체를 구축하는 행위이고, 그게 바로 건축의 본질이라는 뜻이니까요.
- 브루탈리즘은 못생긴 건축이 아니라 '가짜 없음'을 선언한 사조입니다
- 노출 콘크리트(exposed concrete)란 표면을 마감재 없이 콘크리트 그대로 드러낸 구조를 말합니다
- 영화 제목이 단순한 장르명이 아닌 주인공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건축미학으로 읽으면 보이는 것들, 그리고 제가 아쉬웠던 것
이 영화를 건축적 시선으로 분석한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야, 제가 막연히 '멋있다'고 느꼈던 장면들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라슬로가 처음 디자인한 의자, 그다음 서재, 마지막으로 반 뷰런 인스티튜트라는 센터. 이 세 작업이 사실상 동일한 형태적 원리를 반복 확장한다는 점입니다. 의자의 두 선이 겹치는 구조가 센터의 두 탑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가 발생한다는 점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자를 세발자전거(tricycle)에 빗댄 장면이 있는데, 세발자전거는 삼인 가족의 구조와도 닮아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 단위가 거의 모두 세 명입니다. 건축주 가족도, 라슬로 가족도. 즉 의자에서 시작한 형태가 서재로 이어지고, 서재가 센터로 이어지고, 그 센터는 결국 라슬로 자신의 몸이자 가족이자 역사 전체라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이건 제가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층위입니다.
반면 저는 개인적으로 빛의 십자가 장면에 대해서는 다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건축에서 공간과 빛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레퍼런스가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입니다(출처: 안도 타다오 공식 사이트). 빛의 교회에서 콘크리트 슬릿 두 개로 만든 십자가 빛이 압도적인 이유는 그 건물 전체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대한 인스티튜트 안에서 예배당 한 귀퉁이에 떨어지는 빛의 십자가는, 공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스케일이 완전히 다릅니다. 개념으로서는 이해가 되지만, 그것이 공간적으로 구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제 경험상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패션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에드리언 브로디가 입는 유럽식 핏의 옷들이 미국 부자들의 넓고 여유로운 실루엣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방식이 꽤 재미있었습니다. 노동자 복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계급이 옷으로 표현되는 장면들이 대사보다 더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 영화 속 세 작업(의자→서재→센터)은 형태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건축 여정입니다
- 빛과 공간의 관계, 즉 공간 구성에서 자연광이 갖는 의미는 브루탈리즘의 핵심 미학 요소 중 하나입니다
- 의상을 통한 계급 표현이 영화 전체에 시각 언어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비교해서 보면 달라지는 것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떠올랐던 영화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였습니다. 주제 면에서도, 장면의 어떤 변주 방식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관련 리뷰를 찾아봐도 두 영화를 직접 연결하는 글은 거의 없더라고요. 저만 그렇게 느낀 건지 의아했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무의식과 인간의 의식적 태도 사이의 간극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태도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지점이 그 영화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브루탈리스트>는 그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방향이 다릅니다. 이 영화는 무의식적 고통이나 예지몽 같은 요소들을 다루면서도, 결국 강조하는 건 태도가 아니라 목적입니다. 라슬로가 모든 걸 잃고도 센터를 완성하려 했던 이유가 어디서 왔는가. 그 질문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구체적인 소재로 말하자면 '춤'입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첫 장면에서 변주되는 춤의 이미지가 <브루탈리스트>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된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단순한 오마주라기보다는, 인간의 무의식적 충동이 신체적 행위로 번역되는 방식을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한편 영화를 보면서 계급, 인종, 종교, 동성애 문제가 이야기의 바닥에 깔려 있다는 건 느꼈지만,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배경 지식이 충분하지 않아서인지 인물들의 행동이 때로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건 자막으로 보는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일부 선정적인 장면이나 약물 묘사가 영화의 밀도에 반드시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에 비해 그 부분들은 조금 과잉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노년의 소피아가 삼촌의 건축을 회고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건축비평(architectural criticism)이란 완성된 공간을 사후적으로 언어화하는 행위인데(출처: The Architectural Review), 영화는 그 장면에서 언어가 공간을 얼마나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센터라는 건물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영화가 끝난다는 게, 그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88년생 감독이 이 규모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묘한 감각을 더했습니다. 거장의 완성형 작품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영화 문법이 지금 막 형성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느낌이랄까요. 시네마적인 벅차오름이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모두에게 잘 맞는 영화는 아닙니다. 전반부를 좋아하고 후반부를 아쉬워하는 반응이 많은데, 저는 두 파트를 분리해서 볼 수 있는지 자체가 의문입니다. 1950년대 미국사에 익숙하거나, 건축이라는 행위에 어떤 감각적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