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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판타스틱4를 한 편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름은 알아도 리드 리처드가 누군지, 수잔 스톰이 뭘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냥 이번 주 좀비따이 보러 영화관 갔다가 줄이 너무 길어서 반쯤 충동적으로 들어간 게 판타스틱4였는데, 막상 보고 나왔더니 생각보다 훨씬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기대치가 낮았던 게 오히려 득이 됐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판타스틱4 첫 관람인데도 진입장벽이 없었던 이유
제가 마블 시리즈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게 있습니다. 어벤져스 시리즈야 워낙 봐왔으니 따라가는데, 근래 들어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영화 절반은 날아가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데드풀과 울버린 볼 때가 제 입장에서 마블 진입 장벽의 정점이었습니다. 보면서 "저 캐릭터가 왜 저기 있지?"를 반복했으니까요.
그런데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은 달랐습니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리부트(reboot), 즉 기존 이야기를 완전히 초기화하고 새 출발점으로 삼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전 시리즈를 알 필요가 전혀 없도록 처음부터 다시 쌓는 구조입니다. 실제로 영화 시작 직후 몇 분 안에 네 인물이 어떻게 초능력을 얻게 됐는지가 깔끔하게 정리되는데, 저처럼 판타스틱4를 단 한 편도 안 본 사람도 그냥 흡수가 됐습니다.
판타스틱4 멤버 네 명의 구성도 처음 보는 분들을 위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리드 리처드(페드로 파스칼): 몸이 고무처럼 늘어나는 능력. 팀의 리더이자 과학자 기질의 남편
- 수잔 스톰(바네사 커비): 투명화와 염력(念力, 물리적 접촉 없이 물체를 움직이는 능력)을 동시에 쓰는 인비저블 우먼. 직접 보니 넷 중 전투력이 가장 높았습니다
- 조니 스톰(조셉 퀸): 온몸이 화염으로 변하는 휴먼 토치.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
- 벤 그림(에번 모스베크랙): 바위처럼 단단하게 변신한 더 씽. 외형이 완전히 바뀐 유일한 멤버
마블 스튜디오는 이번 리부트를 통해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즉 마블 영화들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된 거대한 프랜차이즈의 새로운 기초를 쌓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의도가 적어도 진입 장벽 제거라는 측면에서는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합니다.
빌런 갤럭투스와 실버서퍼, 포스는 있는데 결말이 아쉬운 이유
저는 갤럭투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의 외형 디자인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딘가 대두 건담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거대한 존재감 자체는 충분히 전달됐어요.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갤럭투스는 마블 코믹스 원작 기준으로 타노스보다 상위 티어로 분류되는 우주적 존재(cosmic entity)입니다. 우주적 존재란 특정 행성이나 종족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 차원에서 작동하는 힘을 가진 캐릭터를 의미합니다. 그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막상 최종 대결 장면에서는 너무 허무하게 마무리됩니다. 제 눈에는 피지컬은 살려뒀는데 판단력과 전술 능력을 거의 제거해버린 것처럼 보였어요. 어떻게든 네 명의 히어로가 이겨야 하는 구조니까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긴 한데, 그걸 감안해도 긴장감이 너무 빨리 끝났습니다.
반면 실버 서퍼는 달랐습니다. 이 캐릭터에는 단순한 전령 이상의 서사가 부여돼 있어요. 왜 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배경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단순한 빌런이라기보다는 사정이 있는 존재로 읽힙니다. 갤럭투스와 실버 서퍼를 만나고 도망치면서 시작된 초반 추격 시퀀스는 저도 진짜 흥미진진했습니다. 그 장면만큼의 긴장감이 클라이맥스까지 이어졌다면 평가가 꽤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건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갈등 구조입니다.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준으로 행동을 판단하는 사상으로, 쉽게 말해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게 옳은가를 묻는 논리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바로 그 질문이 나오는데,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18세기 철학자 제러미 벤담에서 출발해 대중문화에서도 꾸준히 소재로 다뤄져 온 오래된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이 조금 너무 손쉽게 풀립니다. 조금만 더 끌었더라면 훨씬 묵직하게 남았을 텐데, 아쉬운 지점입니다.
히어로 영화를 가족영화로 만든 선택, 득인가 실인가
솔직히 이건 처음에 좀 의외였습니다. 마블 히어로 영화라고 하면 액션 퍼레이드를 기대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리드 리처드와 수잔 스톰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벌어지는 일상의 감정들이 중심축입니다. 히어로의 액션보다 이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네 명이 함께 만들어가는 가족 같은 유대가 영화의 주된 온도를 결정합니다.
리드 리처드 캐릭터가 특히 제 경험상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히어로라기보다 과학자에 가깝습니다.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계산하고 대비하는 기질이 있어서, 다들 임신을 축하하는 상황에서 혼자 "우주 방사능에 노출된 우리 부부의 아이가 괜찮을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보다 보면 그게 이 캐릭터의 진짜 고뇌라는 게 전달됩니다.
반면 인비저블 우먼인 수잔은 감정적이고 직관적으로 반응합니다. 이 둘의 성격 차이가 영화 내에서 작은 균열을 만들다가 한 번 최고조로 치닫는데, 그게 너무 빨리 봉합됩니다. 갈등이 진짜 무게를 갖기 시작하는 순간에 수습이 돼버려서, 제가 보기엔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편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벤 그림, 말파이트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이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제일 안타까웠습니다. 성격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팀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인데, 액션 신에서의 비중이 유독 작습니다. 마블 스튜디오가 이 캐릭터에 대해 이후 작품에서 분량을 더 챙겨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부러 남겨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쿠키 영상은 두 개인데, 첫 번째 쿠키가 꽤 중요합니다. 닥터 둠과 616 유니버스(마블 코믹스의 정식 메인 지구 번호로, MCU 세계관에서 원본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로 연결되는 단서가 담겨 있어서,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 둠스데이의 포석처럼 읽힙니다. 실제로 출처: Marvel 공식 사이트에서도 이 연결고리에 대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보시길 권합니다.
정리하면,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은 폭발적인 도파민보다 잔잔한 온도를 선택한 마블 영화입니다. 근 몇 년간 마블이 연속으로 기대를 밑돌던 시기가 있었는데, 썬더볼츠에 이어 이 작품도 그 흐름을 어느 정도 바로잡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받았습니다. 빌런의 마무리가 허무하고 일부 캐릭터의 비중이 아쉽긴 해도, 괴작 수준은 절대 아닙니다. 무난하게 잘 만든 작품입니다.
마블을 잘 모르는 분, 혹은 전 시리즈를 챙겨보지 못한 분에게 오히려 이 영화가 입문으로 적합할 수 있습니다. 시원시원한 액션보다 이야기 흐름을 즐기는 편이라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겁니다. 2025년 겨울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앞두고 MCU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면, 이 영화가 그 지도의 첫 페이지가 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3b89VYxTHXs&list=PLGVL4jSsBr-44eGgF8lu3x9LfnUAf3tLh&index=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