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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영화라고 믿고 눌렀는데, 중간에 갑자기 AI 철학 영화가 되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대홍수>가 딱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느 정도 악평을 듣고 나서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그럭저럭 볼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 '볼 만했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이 영화가 왜 좋은 소재를 가지고도 맛이 없어졌는지, 제 나름대로 뜯어봤습니다.
재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게 SF라고요?
재난 영화를 보러 갔다가 SF 철학 강의를 들은 기분, 혹시 공감하시나요? <대홍수>는 예고편부터 김다미, 박혜수라는 이름값과 함께 전형적인 재난 스릴러 비주얼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남극에 소행성이 충돌해 빙하가 녹으면서 지구에 대홍수가 발생하고, 3층짜리 아파트에 살던 엄마와 아들이 탈출을 시도한다는 초반 설정은 분명 재난물의 문법을 따릅니다. 더 테러 라이브로 데뷔한 김병우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도 기대를 높인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초반 40~50분을 지나면서 갑자기 장르를 바꿉니다. 알고 보니 이 이야기는 이모션 엔진(Emotion Engine)을 개발하는 AI 연구 프로젝트가 배경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모션 엔진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 신체에 감정·사고·개성 같은 고유한 인간성을 심어 넣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로봇에 영혼을 주입하는 기술입니다. 아들은 그 실험체였고, 엄마인 김다미는 이 엔진의 '감정 파트'를 담당하는 연구원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평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반전 자체는 큰 충격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사전 정보 없이 봤다면 분명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즉 문명이 붕괴된 이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장르물이라고 기대했는데 갑자기 딥러닝(Deep Learning)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딥러닝이란 대량의 데이터를 반복 학습해 패턴을 스스로 찾아내는 AI 기술인데, 이 영화에서는 김다미가 무한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감정을 학습시키는 과정의 근거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너무 얕습니다.
- 초반 재난 상황은 재난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뮬레이션의 배경
- 아들은 AI 실험체이며, 이모션 엔진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등장
- 중반 이후 영화는 SF 딥러닝 시뮬레이션 장르로 완전히 전환됨
- 장르 전환의 복선은 있지만, 연출력 부족으로 예측이 너무 쉬움
제가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우주선 장면과 다시 침대에서 시작되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아, 이제 반복 시뮬레이션으로 넘어가는구나"를 바로 읽었다는 겁니다. 카메라 테두리에 사이버 효과를 살짝 주는 연출로는 관객의 예상을 뒤집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감독이 의도한 반전의 쾌감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모션 엔진 학습, 왜 긴장이 안 될까
영화의 중반부 이후, 핵심은 이겁니다. 김다미가 시뮬레이션 안에서 이모션 엔진의 '엄마 감정 파트'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은 아들을 살리는 선택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물어볼게요. 이 과정이 재밌었나요? 저는 그럭저럭 봤다고 했지만, 이 중반부만큼은 진짜 지루했습니다.
문제는 규칙이 없다는 겁니다. 이모션 엔진이 완성되는 조건이 뭔지, 어떤 선택을 해야 어떤 감정 수치가 올라가는 건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하면 퀘스트 완료, 저렇게 하면 실패"입니다. AI 학습 원리를 소재로 삼았으면서 정작 그 학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SF적 디테일이 없습니다. 이건 컨셉을 빌려온 것이지, 컨셉을 이해하고 영화화한 것이 아닙니다.
비교하자면, 영화 <컨택트>(출처: IMDb - Arrival)는 외계 언어 해독이라는 SF적 설정을 언어학적 규칙과 함께 치밀하게 설명합니다. 관객이 그 규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선택하는 매 순간이 긴장됩니다. <대홍수>는 그 규칙을 비워 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어차피 또 하면 되잖아"라는 무감각 속에서 영화를 봅니다.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딜레마의 부재입니다. 시뮬레이션에서 임산부를 돕든 안 돕든, 갇힌 아이를 구하든 말든, 실패하면 그냥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관객도 그걸 압니다. 리스크가 없으면 긴장도 없습니다. 실제로 시도 횟수가 화면에 숫자로 나오는데, 10만 회가 넘어가는 순간 이미 "20만이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덕적 딜레마(Moral Dilemma), 즉 선택지마다 포기해야 하는 가치가 충돌하는 구조가 있었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됐을 겁니다. 도덕적 딜레마란 어느 선택을 해도 손실이 발생하는 갈등 상황으로, 관객이 캐릭터의 선택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만드는 핵심 장치입니다.
영화 전반의 서사 구조를 분석한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장르 분석 자료에 따르면, 관객 몰입도는 캐릭터의 선택이 실질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느낄 때 가장 높아집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완전히 놓쳤습니다.
- 이모션 엔진 학습 조건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몰입 불가
- 시뮬레이션 재시도 횟수 제한이 없어 모든 선택의 긴장감 소멸
- 도덕적 딜레마 없이 정답이 명확한 퀘스트만 반복되어 지루함 발생
시리즈물이었다면 평가가 달랐을까
제가 영화를 다 보고 든 가장 강한 생각이 있습니다. 이거 5화짜리 넷플릭스 시리즈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겁니다. 1화부터 3화까지는 철저하게 재난물로, 4화부터 반전과 SF 요소를 전개하고, 5화에서 모성애와 이모션 엔진의 완성을 묶어 마무리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08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재난, SF, 딥러닝 시뮬레이션, 모성애 철학까지 다 담으려다 보니 모든 게 얕아졌습니다. 비유하자면, 절절한 감성 드라마에서 "우리 이제 이별해요"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서 액션 격투를 5분간 하는 장면 같습니다. 장르의 결이 맞지 않아서 어느 쪽도 제대로 살지 않는 겁니다.
이 영화가 목표로 삼은 건 분명 <인터스텔라>나 <컨택트> 같은, 장르적 오락성과 감성 드라마를 동시에 챙기는 대규모 SF였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완성된 건 <어나더 어스>나 <세상의 끝까지 21일> 같은, 소규모 예산으로 SF 배경 위에 인물 드라마를 얹은 소품 영화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소품 영화의 밀도도 갖추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전혜진 씨가 연기한 상사 캐릭터, 박혜수 씨의 요원 캐릭터 모두 충분히 쓰이지 못하고 허무하게 소비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 낭비는 각본 단계에서 분량을 너무 욕심낸 경우에 자주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소재 자체의 신선함은 인정합니다. AI와 모성애라는, 가장 기계적인 것과 가장 인간적인 것의 대립. 노아의 홍수를 연상케 하는 엄마와 아들의 새 인류 건설이라는 종교적 모티브. 이것들을 잘 엮었다면, 정말 매력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나쁜 게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영화 한 편에 우겨넣은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재미없다고 단정하기보다, 저는 이 영화를 '아까운 영화'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사전에 악평을 듣고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볼 만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기대치가 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대하고 본 분들의 실망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재난물을 원하는 분, SF 디테일을 원하는 분, 감성 모성 드라마를 원하는 분 어느 쪽도 100% 만족시키지 못하는 영화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부담 없이 틀어놓을 수는 있지만, 집중해서 몰입하려 하면 어딘가 계속 걸립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기대치를 충분히 낮추고 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이 영화를 가장 괜찮게 즐기는 방법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RQD_bQ-35A&list=PLGVL4jSsBr-44eGgF8lu3x9LfnUAf3tLh&index=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