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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버 (기대감, 서사구조, 페미니즘, 판단)

주.만.지 2026. 7. 24. 13:12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도연에 오승욱 감독이라는 조합이면 최소한 기본값은 보장된다고 믿었거든요. 그 믿음이 틀렸습니다. 2025년 개봉작 <리볼버>를 보고 나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였습니다.

    기대감 — 믿었던 조합이 주는 함정

    일반적으로 특정 감독과 배우의 조합이 검증된 전작이 있으면 후속작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리볼버>가 딱 그랬습니다. 오승욱 감독은 2015년작 <무뢰한>으로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바 있고, 그 영화는 지금도 국내 느와르 장르의 수작으로 꼽힙니다. 여기서 느와르(noir)란 어둡고 비도덕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탐욕과 배신을 그리는 장르를 의미합니다. 제가 <무뢰한>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습니다.

    배우 라인업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도연, 지창욱, 임지연을 중심으로 조현진, 김준한, 김종수, 정만식까지. 특별출연으로 이정재와 정재영, 전혜진까지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정도면 캐스팅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봉 당일 바로 예매를 잡았고, 제가 직접 극장에 가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기대치가 독이 됩니다. 영화 평론 이론에서는 이를 기대 불일치 효과(Expectancy Disconfirmation Effect)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도 그만큼 크게 느껴진다는 원리입니다. <리볼버>는 이 효과의 교과서적 사례가 되고 말았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에서 개봉 정보 확인 가능).

    • 오승욱 감독 × 전도연 조합의 전작 <무뢰한>(2015) — 국내 느와르 수작으로 평가받음
    • 이정재·정재영 특별출연 — 이름 자체가 스포인 배우 이름 개그로도 읽힘
    • 상영 시간 114분(1시간 54분) / 15세 이상 관람가
    요약: 검증된 감독·배우 조합이 만든 높은 기대치가 오히려 실망을 키우는 함정이 됐습니다.

    서사구조 — 떡밥은 난무하고 회수는 없다

    이야기 뼈대 자체는 단순합니다. 경찰 비리에 연루된 전도연이 꼬리 자르기를 당해 2년 복역 후 출소했더니 약속했던 보상금이 사라졌고, 그걸 되찾으려 고군분투한다는 것입니다. 뻔하지만 이 정도면 장르영화로서 충분히 성립합니다. 문제는 감독이 이 단순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두지 않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경우는 열에 일곱은 실패합니다.

    영화는 무당 이야기, 아파트 명의 추적, 허정미라는 정체불명의 인물, 김준한과 전도연의 과거 감정 서사, 임지연 캐릭터의 전 남편 설정까지 쉴 새 없이 떡밥을 던집니다. 여기서 맥거핀(MacGuffin)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맥거핀이란 관객의 주의를 끌지만 결말에 아무런 실질적 역할을 하지 않는 장치를 뜻합니다. 히치콕이 즐겨 쓴 기법인데, 중요한 건 맥거핀이 본 서사와 단단히 묶여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리볼버>의 떡밥들은 그냥 흘러가고 끝납니다. 회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관객은 중반까지 "뭔가 있다"는 긴장감에 앉아 있다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저도 초반에는 꽤 흥미롭게 봤습니다. 이정재 캐릭터의 역할이 궁금했고, 돈이 왜 전달되지 않았는지 추리하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근데 그 정답이 "지창욱이 도박으로 탕진했다"는 단 한 줄로 구두 설명되는 순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 이렇게까지 허망할 줄은.

    오승욱 감독의 데뷔작 <킬리만자로>(2000)에서 홍콩 느와르식으로 여러 인물의 서사가 교차하다 한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만나는 구조를 썼고, 이번에도 그 방식을 재현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도는 읽히는데 실행이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식 군상극(ensemble narrative), 즉 여러 인물의 개별 서사가 병렬로 진행되다 충돌하는 방식을 따르려 했지만, 각 서사가 본줄기에 붙질 않으니 그냥 분산만 됩니다.

    요약: 회수되지 않는 떡밥과 본 서사에 붙지 않는 군상극 구조가 영화 전체의 밀도를 무너뜨렸습니다.

    페미니즘 —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단순히 실패작으로 분류하기가 좀 망설여집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든 생각인데, <리볼버>는 꽤 진취적인 페미니즘 영화로 읽힙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르는 남성 중심 액션 서사에 여성 주인공을 얹는 구조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는 그것과 결이 다릅니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은 여성들 사이의 의리입니다. 전도연을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임지연이 결국 전도연 편에 서는 흐름, 낚시터 아줌마가 5천만 원 뭉치에서 5만 원만 조용히 꺼내 가는 장면, 그리고 결말부의 전혜진까지. 남성들이 만든 비리와 배신의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그림이 영화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에 공감했던 관객이라면 이 지점에서 다른 독법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전혜진과 지창욱의 관계가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이 둘을 처음에 남매처럼 보이게 연출하다가 마지막에 모자(母子) 관계임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모성애 서사가 작동합니다. 찌질하고 사고만 치는 아들을 끝까지 감싸는 어머니. 감독이 남녀 관계까지 이런 모성적 보호 구도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시선이라고 봅니다(출처: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 감독 정보에서 오승욱 필모그래피 참조 가능).

    그리고 전도연의 돈에 대한 집착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그나마 남은 이정재에 대한 의리처럼 읽힙니다. 이정재는 꼬리 자르기를 한 건 맞지만, 이 영화에서 전도연을 유일하게 배신한 남자는 아닙니다. 그 미묘한 차이가 전도연의 행동에 복잡한 결을 줍니다.

    요약: 장르적 완성도와 별개로, 이 영화는 여성들의 의리와 모성 서사를 중심에 놓은 페미니즘적 독해가 가능한 작품입니다.

    최종 판단 — 감독판이 나온다면 달라질까

    제가 직접 극장에서 보고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배우들은 죄가 없습니다. 지창욱의 찌질하고 통제 불능인 연기, 임지연의 여우 같은 감초 연기는 솔직히 사랑스럽습니다. 캐릭터 자체가 일차원적으로 설계된 것이지, 배우들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특히 지창욱 캐릭터는 앤디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데, 이 인물이 그냥 금쪽이입니다. 오은영 박사님 상담이 필요한 수준의 캐릭터인데, 그 찌질함을 지창욱이 설득력 있게 구현해냈다는 건 인정합니다.

    스태프롤에 쿠팡플레이가 제작 지원으로 올라온 걸 확인했습니다. 이미 OTT 플랫폼이 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극장을 망설이시는 분들은 쿠팡플레이 공개를 기다려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판단이고, 극장 화면의 때깔과 음향이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인 만큼 경험 자체를 원하시면 극장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감독판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오승욱 감독이 본인이 좋아하는 장르적 요소들을 전부 집어넣으려 한 흔적이 역력한 만큼,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간 서사가 복원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일관된 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건 미래의 일이고, 지금 이 상태로는 아쉬움이 큽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6FCN15WIsA

    요약: 배우와 연출의 때깔은 살아있지만 서사가 받쳐주지 못한 아쉬운 작품 — OTT 공개 후 감독판을 기대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