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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종 (페이크 다큐, 곡성 비교)

주.만.지 2026. 7. 20. 18:58

목차


     

    저는 공포영화를 거의 안 봅니다. 점프스케어가 너무 싫고, 권선징악 공식도 지겨워서 굳이 돈 내고 극장에 갈 이유를 못 느꼈거든요. 근데 랑종은 달랐습니다. 곡성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 하나로 표를 끊었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절반쯤 맞았습니다. 무서운 걸 기대하고 갔다가 그게 아닌 걸 보고 왔는데, 그게 오히려 더 오래 남았습니다.

    페이크 다큐가 만들어낸 소름, 무섭지 않아서 더 찜찜했습니다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저 같은 쫄보 입장에서 랑종은 꽤 특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소리 지르게 만드는 장면보다, 뭔가 모르게 찜찜하고 피부에 끈적이는 느낌이 계속 남는 영화였거든요. 점프스케어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서너 번 정도밖에 없고, 무서움의 방향이 시각이나 청각보다는 촉각 쪽에 가깝습니다. 극장을 나서고 나서도 뭔가 찝찝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는 종류의 불쾌감이랄까요.

    이 영화의 핵심 형식은 모큐멘터리(mockumentary)입니다. 여기서 모큐멘터리란 실제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된 것처럼 꾸민 허구의 영화 형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태국 시골 마을의 무당 가계를 취재하는 다큐 팀이 있고, 그 카메라에 우연히 무언가 담겼다는 설정입니다. 곳곳에 설치된 CCTV 화면이 끼어들고, 핸드헬드(handheld) 촬영, 즉 카메라를 손에 들고 흔들리게 찍는 방식이 영화 전반을 채웁니다. 이 흔들리는 화면이 오히려 극의 사실감을 끌어올립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초반 빌드업 구간이었습니다. 지루하다는 관객도 많던데, 저는 오히려 그 구간이 클라이맥스보다 더 재밌었습니다. 다큐 느낌이 진짜로 살아있고, 앵글 하나하나 신경 써서 잡은 티가 납니다. 무엇보다 태국의 토속신앙이라는 소재 자체가 치트키 수준으로 낯설고 흥미롭습니다. 출처: Wikipedia — Shamanism에 따르면 샤머니즘(shamanism)은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형태 중 하나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습니다. 여기서 샤머니즘이란 무당이나 영매가 신이나 영혼과 직접 소통한다고 믿는 원초적 신앙 체계를 말합니다. 그 낯섦이 영화에 사실감을 더하는 방식이, 저 같은 외부인 관객에게는 더 강하게 작동했습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블레어 위치, 곤지암처럼 페이크 다큐 공포영화는 꽤 있지만, 랑종이 다른 지점은 무속 의식(ritual)을 스펙터클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무속 의식이란 특정 신령을 불러들이거나 쫓아내기 위해 무당이 행하는 절차적 의례를 뜻합니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퇴마 의식 장면은 규모 자체가 압도적이라, 진이 좀 빠지는 건 맞습니다. 그래도 그 전까지 쌓아 올린 분위기 덕분에 맥락이 살아있습니다.

    • 점프스케어 3~4회, 극도로 예민한 분 외에는 버틸 만한 수준
    • 고어 장면 일부 포함되지만 길게 비추지 않아 잔인함보다 음산함이 주된 감각
    • 노출 및 정사 장면이 잠깐 있으나 에로틱한 맥락이 전혀 아님
    • 모큐멘터리 형식 특성상 배우들의 자연 연기가 몰입감을 좌우하는데, 일부 캐릭터의 톤이 이 세계관과 살짝 어긋나는 느낌이 있음
    요약: 랑종은 점프스케어 위주의 공포보다, 모큐멘터리 형식과 샤머니즘 소재가 만들어내는 촉각적 불쾌감이 핵심인 영화입니다.

    곡성과 비교하면 보이는 것, 나홍진 세계관의 뼈대

    랑종은 나홍진 감독이 원안(original story)을 쓰고, 태국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이 연출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원안이란 시나리오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 구조와 세계관 설정을 말합니다. 반종 피산다나쿤은 태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감독으로(출처: Thai Film Database), 공포 장르에서는 이미 셔터(2004)로 검증된 이름입니다. 이 두 사람의 조합이 랑종을 단순한 태국 공포영화와 다른 결로 만들어 냅니다.

    곡성을 재미있게 봤던 관객이라면 랑종에서 낯익은 구조를 금방 알아챌 겁니다. 딸이 악령에 빙의(spirit possession)되고, 부모 입장에서는 그걸 막으려고 굿판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빙의란 외부의 신령이나 악령이 특정 인물의 몸에 들어와 그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구조만 놓고 보면 곡성과 거의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세부적인 디테일과 질감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게 반종 감독의 몫이고, 세계관의 뼈대를 만드는 건 나홍진 감독의 몫입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를 보면서 곡성의 무당 일광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곡성에서 일광은 선인지 악인지 끝내 명확하지 않은 인물인데, 랑종의 무당 님(Nim)은 그 일광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전사처럼 읽힙니다. 이걸 의식하고 보면 두 영화 사이의 연결감이 꽤 짜릿합니다.

    나홍진 감독 특유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악은 압도적으로 가까이 있고 선은 침묵한다는 겁니다. 곡성에서도, 랑종에서도, 악의 존재는 너무 생생한데 선이 어디에 있는지는 끝내 흐릿합니다. 이건 단순히 공포 장르의 문법이 아니라, 삶에서 부조리하고 나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정의나 구원이 응답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시각화한 겁니다. 저는 이 지점이 랑종을 보고 나서도 며칠 동안 찜찜하게 남은 진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기대에 완전히 부응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곡성을 재밌고 무섭게 봤던 관객 중 한 명으로서, 나홍진 감독에 대한 기대치가 높게 쌓여 있던 탓도 있을 겁니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설렘이 컸던 만큼, 그 기대 무게가 평가에 영향을 줬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곡성이 5점짜리 영화였다면 랑종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느낌입니다.

    • 곡성을 재미있게 봤다면 랑종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 곡성이 무서워서 못 봤거나 지루하게 봤다면 랑종도 비슷한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 두 영화를 연결 지어 보고 싶다면 곡성의 일광과 랑종의 님을 같은 선상에서 읽어보는 걸 권합니다
    요약: 랑종은 나홍진 세계관의 연장선에서 곡성과 맞닿아 있으며, 선의 침묵과 악의 압도라는 주제를 태국 샤머니즘의 언어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공포영화를 안 좋아하는 분이라도 곡성 계열의 미스터리 스릴러가 취향이라면 랑종은 한 번쯤 극장에서 볼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무서운 영화를 보러 간다는 마음보다, 찜찜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끝까지 버티겠다는 각오로 가는 겁니다. 집에서 혼자 다운받아 보면 솔직히 무서움이 반 이상 날아갑니다. 이 영화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과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촉각적 불쾌감이 핵심이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jzDiYt2i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