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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웨스턴, 맨슨, 헌정)

주.만.지 2026. 7. 16. 10:41

목차


     

    1969년 8월, 찰스 맨슨이 이끄는 맨슨 패밀리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아내 샤론 테이트를 포함한 다섯 명을 살해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바로 그 해, 그 할리우드를 무대로 자신의 아홉 번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고 영화를 틀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복수극이나 액션을 기대했는데 전혀 다른 온도의 영화가 시작됐거든요.

    타란티노가 1969년에 바친 것 — 웨스턴에 대한 사랑

    영화의 배경이 된 1969년은 단순히 과거가 아닙니다. 68혁명(1968 Revolution)이 휩쓸고 간 직후, 권위주의적 질서가 무너지고 히피 문화가 절정에 달하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여기서 68혁명이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번진 반체제·반권위주의 운동으로, 수직적 사회 구조를 수평적·다원적 방향으로 뒤흔든 문화적 대격변을 의미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그 거대한 역사 앞에서 오히려 정치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선택을 합니다.

    주인공 릭 달튼은 TV 서부극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이제는 한물간 배우입니다. 제가 이 캐릭터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타란티노가 비디오가게 점원 시절부터 열렬히 좋아했다는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이었습니다.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1960~70년대 이탈리아 제작사들이 찍어낸 서부극 장르로, 당시 할리우드에서 밀려난 배우들이 주로 출연하며 B급 오락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릭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새 출발을 고민하는 장면이 바로 그 역사 위에 놓여 있는 것이죠.

    타란티노는 그 잊혀진 배우들을 그냥 두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촬영 현장에서 대사를 틀리고, 트레일러로 돌아와 혼자 분노를 삭이며 자책하는 장면 —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장면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화려한 액션이 아니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스스로에게 실망한 어느 중년 배우의 고뇌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이요. 뒷부분의 통쾌한 복수보다 오히려 앞부분이 더 좋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릭 달튼: 한물간 TV 서부극 배우,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으로의 전환을 고민하는 인물
    • 클리프 부스: 릭의 스턴트 대역이자 절친한 친구,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절제된 캐릭터
    • 세르지오 레오네(출처: Wikipedia - Sergio Leone):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영화 곳곳에 오마주가 녹아 있음
    요약: 타란티노는 릭 달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스파게티 웨스턴 시대를 살았던 잊혀진 배우들에게 조용한 경의를 바칩니다.

    맨슨 패밀리와 히피 — 낭만과 공포가 공존한 시대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찰스 맨슨과 맨슨 패밀리(Manson Family)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거의 필수입니다. 맨슨 패밀리란 1960년대 말 찰스 맨슨이 조직한 컬트 집단으로, 1969년 8월 로만 폴란스키의 자택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샤론 테이트를 포함한 다섯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실제 사건의 주범입니다(출처: Britannica - Charles Manson). 영화는 이 역사적 사건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기 때문에, 모르고 보면 결말의 무게가 절반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타란티노가 그린 히피들은 철저하게 조롱의 대상입니다. 낮에 마약에 취해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다가, 밤에는 "TV가 살인을 가르쳤다"고 외치며 칼을 드는 위선이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펼쳐집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타란티노 특유의 비웃음이었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보헤미안(Bohemian) 이상주의자들 — 여기서 보헤미안이란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방랑자적 예술가 기질을 뜻합니다 — 의 실체가 얼마나 공허한가를 타란티노는 클리프 부스의 폭력으로 직접 증명합니다.

    전작들에서 타란티노의 폭력은 주로 복수의 형태였습니다. 장고는 복수했고, 잉글로리어스 바스터즈도 복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클리프가 히피들을 패는 장면은 복수라기보다는 멸시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무기를 들고도 개 한 마리 상대 못 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이라고 비하하는 것처럼 보였달까요.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카타르시스였습니다.

    요약: 타란티노는 히피 이상주의의 허상을 냉소적으로 해체하며, 찰스 맨슨과 맨슨 패밀리에 대한 단죄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완성합니다.

    샤론 테이트에게 바치는 헌정 — 영화가 지키고 싶었던 것

    영화에서 샤론 테이트의 분량은 적지 않은데, 비중은 오히려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처음엔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게 의도라는 걸 알게 됩니다. 타란티노는 샤론 테이트를 이야기의 도구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아있게 두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가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서 보며 관객들의 반응에 뿌듯해하고, 포스터 앞에서 사진 찍고, 친구들과 웃는 26세 여배우를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화면에 담은 것입니다.

    영화 안에 깨알같이 재현된 실존 인물들도 이 헌정의 일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스티브 맥퀸이 샤론 테이트에게 반하면서도 "소년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니, 나는 어림없겠군" 하며 고뇌하는 장면은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브루스 리가 샤론 테이트에게 다정하게 무술 훈련을 가르쳐주는 장면도, 대탈주 캐스팅 순위 회상 씬에서 실제 화면비와 컬러, 스티브 맥퀸의 코스튬까지 그대로 재현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대입한 장면도 — 이 모든 것이 "옛날 옛적 할리우드"라는 제목에 정직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개변되는 결말, 굳게 잠겼던 폴란스키가의 대문이 열리고 릭이 샤론을 처음 만나는 그 장면은 판타지입니다. 가상의 인물이 현실의 비극을 막아내고, 살아남은 샤론이 릭을 집 안으로 초대합니다. 제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느낀 감정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위로였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리고 그 아름답고 순수했던 사람을 기억한다는 타란티노의 고백 같았습니다.

    • 역사 개변(Alternate History): 실제 역사의 비극을 픽션으로 뒤집는 타란티노의 반복된 창작 방식 (잉글로리어스 바스터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
    • 샤론 테이트 역의 마고 로비: 대사보다 표정과 존재감으로 캐릭터를 채워내며 헌정의 무게를 온전히 전달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감정 폭발형)와 브래드 피트(절제형)의 대비: 두 배우의 전혀 다른 연기 스타일이 두 캐릭터의 관계를 완성
    요약: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샤론 테이트와 그 시대의 할리우드를 향한 타란티노의 가장 따뜻하고 가장 슬픈 헌정작입니다.

    타란티노 필모그래피에서 내러티브 완결성만 따지면 이 영화는 1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제게도 펄프 픽션의 자리는 여전히 굳건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물간 배우들을, 잊힌 B급 영화들을, 그리고 26세에 세상을 떠난 한 여배우를 기억하겠다는 의지로 만들어진 작품이니까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보기 전에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맨슨 패밀리 사건을 간략하게라도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그 맥락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 결말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LPsc123Tto&list=PLzMlWTOO8JND1pjgph7yiCPtgUdJ9EOOi&index=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