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저는 12.12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현대사 자료를 나름 챙겨봤고, 5공 드라마도 빠짐없이 봤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을 나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나 이거 제대로 모르고 있었구나"였습니다. 정리된 텍스트로 아는 것과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을 통해 체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하나회라는 조직, 실제로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가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몰입했던 부분은 전두광이라는 인물 자체보다, 그 인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구조였습니다. 그 구조의 핵심이 바로 하나회입니다. 하나회란 1951년 경남 진해에서 재개교한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조직으로, 쉽게 말해 군 내부의 비공식 카르텔입니다. 공식 지휘 계통 위에 또 하나의 충성 라인을 깔아놓은 구조인 셈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 인물들을 다시 찾아봤는데, 하나회의 핵심 인물들인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 황영시, 유학성, 허삼수, 허화평이 결국 전부 엮여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치가 떨렸습니다. 이 조직은 '너는 나고 나는 너다'라는 개념으로 결속을 다졌는데, 그게 단순한 전우애가 아니라 계급을 무력화하는 무기가 됩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장교라도 하나회에 들어가는 순간 전두광, 노태관 같은 실세 장군들과 사실상 한 몸이 되는 구조입니다.
영화에서 전두광을 연기한 황정민이 바둑 두는 장면부터 군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장면까지, 저는 그 연기를 보면서 "악동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략가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사실 지략이라기보다는 맵핵 쓰는 거랑 같은 겁니다. 군 내부 내선 전화와 정보망을 독점한 상태에서 정면으로 맞서는 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습니다. 쿠데타(coup d'état)란, 합법적 권력 이양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전두광이 한 일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짚어야 할 인물이 오국상, 실존 인물로는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입니다. 영화에서 김의성이 연기한 이 인물은 부산행에서 봤던 그 이기적인 이미지 그대로였는데, 의도했든 아니든 너무 딱 맞는 캐스팅이었습니다. 보신주의(保身主義)란 자기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태도를 말하는데, 오국상은 그 교과서적인 인물입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가족을 데리고 택시로 도망치고, 주한 미군 기지로 피신해 미사령관의 "괜찮냐"는 질문에 "땡큐"라고 답하는 장면에서 저는 허탈한 웃음이 터졌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인물의 행보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2.12 군사반란 당시 지휘 체계의 공백이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이 잘못된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게 이 비극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 하나회는 공식 지휘 계통 위에 병렬로 깔린 사조직 충성 라인으로, 계급을 사실상 무력화했습니다.
- 전두광의 성공 배경에는 정보 독점과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직위,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 국방부 장관의 이탈은 지휘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켰고, 반란군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 저항 세력이 존재했음에도 핵심 결정권자들의 무능과 이탈로 저항은 조직적으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이 영화가 남기는 것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이태신 역의 정우성을 보고 든 첫 생각은 "장비나 정몽주로 그려놨네"였습니다. 실존 인물인 장태완 장군은 생전 영상을 보면 활활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다혈질 인물인데, 영화 속 이태신은 그와 달리 병 속에 갇힌 불꽃 같은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겉은 차분하지만 속은 더 뜨거운 타입. 정우성이 이걸 생각보다 잘 소화했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다만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포스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장면이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하는데 뭔가 힘이 덜 실렸달까요. 반면 혼자 권총 하나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대규모 부대 진군보다 오히려 더 압도적이었습니다. 연출의 힘이라는 게 그런 거겠죠.
황정민은 뭐, 물 만난 물고기였습니다. 외모도 의도적으로 신시티의 '노란 녀석' 이미지와 비슷하게 뽑아낸 것 같았는데, 인두겁을 쓰고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의 연기였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실존 인물 전두환은 저보다 더했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황정민이 오히려 절제한 편일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 장군들은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대세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으로만 나오는데, 차라리 더 망가뜨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실제 그 사람들이 그랬을 테니까요. 그리고 잘생긴 배우들은 죄다 선역으로만 나오는 공식도 좀 아쉬웠습니다. 영화적 관습이라고 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을 텐데.
오진호 소령, 실존 인물로는 김오랑 소령을 영화화한 인물인데, 공수혁 사령관이 그에게 "너 좀 모자란 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에 박혔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싸우는 것, 그게 영화에서 말하는 진짜 군인의 자세인데 그게 오히려 모자란 것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차마 눈을 못 돌리겠더군요. 항명(抗命)이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를 뜻하지만, 오진호의 선택은 반란군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념 자체가 뒤집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성수 감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을 때도, 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폼을 유지하는 감독이 정말 드문데, 이번 작품에서도 연출 의도가 명확하게 읽혔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하나회 인물들이 실실 웃으며 찍은 사진이 실제 하나회 사진으로 전환되는 장면, 그 컷 하나로 이 영화가 하려는 말이 전부 담겼습니다.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서도 서울의 봄은 1,3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숫자가 이 영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닿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인 아쉬움을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전개 속도는 훌륭하지만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깊이 파고드는 데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캐릭터보다 사건의 흐름이 앞서는 느낌. 만약 거기까지 잡았다면 한국 영화사에 둘도 없을 걸작이 되었을 텐데, 그게 내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10점 만점에 7점은 충분히 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당시 전두환에게 끝까지 맞섰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다행스럽게 느낀 부분이었습니다. 결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 저항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인물들이 충분한 죄값을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는 것, 그래서 이 영화 같은 작품이 더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이라도 보시길 권합니다. 교과서나 뉴스 기사로 12.12를 아는 것과 스크린으로 체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으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t2NgQ1V7m0&list=PLzMlWTOO8JND1pjgph7yiCPtgUdJ9EOOi&index=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