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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 한참이 지났는데도, 별것 아닌 작은 장면 하나가 문득 떠오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런 영화를 딱 하나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이야기합니다. 2003년작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년이 넘은 영화인데도, 볼 때마다 가슴 어딘가에 서늘한 게 고입니다. 한국 리메이크와 비교해서 봤던 분이라면, 원작이 얼마나 다른 온도를 가진 영화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숟가락 하나가 드러낸 것들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는데,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의외로 아주 짧고 조용한 순간이었습니다. 츠네오가 요리하다가 조제에게 숟가락을 내밀며 맛을 봐달라고 하는 장면. 그때 조제가 잠깐 움찔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 찰나가 저는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츠네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별것 아닌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제에게는 그 작은 동작이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던 거죠. 장애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間隙), 쉽게 말해 서로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그 짧은 순간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간극이 결말을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나서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워졌습니다.
원작이 이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제의 움찔함에 대해 카메라도, 츠네오도, 대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연출 미학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 그런데 그 '별것 아닌 것'이 나중에 돌아보면 전부였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영화 연출론(film direction)에서 말하는 서브텍스트(subtext), 그러니까 대사나 행동 밑에 깔려 있는 진짜 의미를 관객 스스로 읽게 만드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는 탁월하게 작동합니다.
한국 리메이크와 비교해 보면 이 차이가 더 선명해집니다. 리메이크판은 조제를 처음부터 '장애인'으로 보여주고, 영석의 동기를 동정과 연민으로 설정합니다. 반면 원작의 조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식칼을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관객이 조제의 장애보다 조제라는 사람 자체에 먼저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가 결말의 온도까지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 숟가락 장면: 설명 없이 스쳐 지나가지만, 두 사람 사이의 본질적 거리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장면
- 원작 조제의 첫 등장: 식칼을 휘두르는 강렬함으로 관객이 '장애'보다 '조제 자체'를 먼저 보게 만드는 설계
- 서브텍스트 연출: 대사와 행동 아래에 진짜 의미를 숨겨두고 관객 스스로 읽게 하는 방식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함
이별의 의미, 도망이라는 진실
이 영화의 이별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했습니다. 통보도, 폭발도, 눈물 가득한 포옹도 없었거든요. 그냥 담담하게, 헤어짐이 왔습니다.
츠네오가 조제를 부모님께 소개하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영화는 그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기도 하다고 조용히 보여줍니다. 조제도 그걸 압니다. 하지만 둘 다 말하지 않아요. 그렇게 바다로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 시작됩니다. 저는 그 장면이 마치 두 사람이 합의한 이별 여행처럼 느껴져서, 그 아름다운 장면들이 오히려 더 슬펐습니다.
이별의 언어(break-up narrativ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별의 언어란 우리가 헤어질 때 스스로에게, 혹은 상대에게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서사를 말합니다. 이 영화는 그 서사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지는 이유가 100가지는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입 밖에 낸 말은 "그냥 도망친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이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전부 껍데기였다는 것. 그 솔직함 때문에 관객은 츠네오를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고기 조명이 흘러가는 호텔 방에서 조제가 했던 대사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담아둔 부분입니다. 사랑을 알아버린 이후로는 사랑을 알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깊은 해저로 혼자 가라앉게 되더라도 슬프지 않다는 담담함. 정확한 대사는 아닐 수 있지만, 그 뉘앙스가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저도 그 장면에서 주루룩 눈물이 났습니다. 담담한 이별이라 더 슬픈 느낌, 그게 이 영화가 가진 힘입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출처: 위키백과 -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에 나오는 대사, "단지 흘러간 일 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조제가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사강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 영화의 인물들도 사랑이 영원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강 자신이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어떤 소스를 곁들이느냐와 같은 취향의 문제"라고 말했을 만큼, 사랑과 이별에 대한 실존주의적(existentialist) 태도를 지녔던 작가입니다. 실존주의란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사랑의 의미도 아름다움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말합니다. 조제라는 캐릭터는 그 철학 위에 서 있습니다.
한국 리메이크가 이 대사와 사강의 소설을 통째로 삭제한 것은,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뼈대를 제거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의 교체는 단순한 각색 실패가 아니라, 원작이 왜 그 책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성장 서사로서의 조제, 그리고 생선 굽는 마지막 장면
이 영화 제목에 왜 호랑이와 물고기가 함께 들어가 있는지,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보고 나니 그 제목이야말로 이 영화의 전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화 초반의 조제는 유모차에 얼굴을 숨기고 다닙니다. 이웃집 남자와 가슴을 만져주는 거래를 하고, 토카레프 권총을 구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건 망상이 아닙니다. 세상이 너무 두렵고 위험해서, 자신을 지킬 가시가 필요했던 사람의 언어입니다. 그 조제가 츠네오의 손을 잡고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걸 보고 싶었다고 했죠. 그 장면이 조제의 심리적 성장 서사(character arc), 즉 캐릭터가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정점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용어는 영화 서사 구조에서 인물이 처음 상태에서 어떤 사건을 거쳐 변화하는 궤적을 말합니다. 조제의 아크는 '두려움으로 웅크린 사람'에서 '혼자서도 바다 밑을 굴러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이끈 것이 호랑이라는 상징이었고요.
그래서 엔딩 장면이 그렇게 울립니다. 조제가 혼자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고 돌아와 생선을 굽고 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물고기를 결국 호텔 방 조명으로밖에 못 봤던 그 조제가, 이제 혼자서 생선을 굽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멍했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조금 안도하기도 하고, 그 복잡한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영화 비평 연구자들도 이 영화의 서사 구조에 대해 주목한 바 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자료에 따르면 장애를 다루는 영화에서 장애인 캐릭터를 동정의 대상이 아닌 입체적 주체로 그리는 사례는 여전히 드물며(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영화는 그 드문 사례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조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요리도 능숙하고, 이별도 담담하게 맞이하고, 마지막엔 혼자서 생선을 굽습니다.
한편 성장 서사와 이별은 이 영화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성장은 갈등이 해결되거나 해소될 때 찾아오는데, 이 영화에서 그 해소의 형태가 바로 헤어짐이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마지막 생선 굽는 장면은 슬프면서도 담담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슬펐다기보다는 묘하게 담담해지는 감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다른 멜로드라마(melodrama)와 확실히 다른 지점입니다. 멜로드라마란 감정의 과잉을 통해 슬픔이나 사랑을 강조하는 장르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절제로 더 많이 말하는 영화입니다.
- 호랑이: 조제가 두려움을 직면하는 상징.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다는 조제의 심리적 변화의 정점
- 물고기: 과거의 조제, 깊은 바다 속에 머물던 자신의 이미지. 엔딩에서 생선을 굽는 장면으로 그 상징이 완성됨
- 전동휠체어로 혼자 장 보는 마지막 장면: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선 조제의 성장을 가장 단순한 일상으로 보여주는 연출
21세기 일본 멜로 영화 중에서 저는 아직 이 영화를 넘어서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국사무쌍이라는 마작 역처럼, 이 영화도 살면서 딱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행운 같은 작품입니다. 그 행운을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지 못한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스쳐갑니다. 흘러간 세월 속에 담담히 남을 뿐이고요.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당장 보시길 권합니다. 한국 리메이크를 먼저 보셨다면, 원작을 보면서 그 차이를 느껴보시는 것도 이 영화를 더 깊이 즐기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저는 10점 만점에 9점을 줍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ANvVbhTU7c&list=PLzMlWTOO8JNB6wjaz1WI2dZrtZ9-T6cSj&index=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