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 중 단 한 편을 꼽으라 했을 때, 최후의 두 작품에 남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2000년작 《화양연화》입니다. 저도 처음 개봉 때 봤고, 그 뒤로 나이 먹어 다시 봤는데 솔직히 그건 제가 기억하던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봤는데, 다시 보니 등장인물들의 고뇌와 뜨거운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더 무서운 열정이었습니다.
공간이 감정을 죄는 방식, 그 구조를 뜯어보면
이 영화가 왜 이토록 숨 막히게 느껴지는지, 저는 꽤 오랫동안 이유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테마곡만 흐르고 대사가 없는 장면들을 볼 때 숨이 턱턱 막히도록 몰입됐거든요. 그 이유를 뒤늦게 파악했을 때, 답은 '공간'이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62년 홍콩의 밀집 주거 환경입니다. 두 주인공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세를 들어 살고 있습니다. 복도는 두 사람이 비켜서야 겨우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계단도 비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대 홍콩의 도시 과밀화(urban overcrowding) 현상을 그대로 담아낸 공간 설계입니다. 여기서 도시 과밀화란 좁은 면적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주거 공간이 극단적으로 압축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1960년대 홍콩의 인구 밀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며, 그 사회적 맥락이 영화 안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출처: 홍콩 정부 통계처).
이 폐소공포적 공간 안에서 왕가위 감독이 선택한 연출 기법은 슬로모션(slow-motion)과 트래킹 샷(tracking shot)의 조합입니다. 슬로모션이란 실제 촬영 속도보다 빠른 프레임 레이트로 찍어 재생 시 동작이 느려 보이게 하는 촬영 기법으로, 찰나의 감정을 영원처럼 늘려놓는 효과를 냅니다. 트래킹 샷은 카메라가 피사체와 함께 수평으로 이동하며 공간을 훑는 방식인데, 이 영화에서는 인물이 퇴장한 뒤 빈 공간을 잠시 비추다 쇼트가 끝나는 형식으로 반복됩니다. 그 빈 공간이 말합니다. 사람은 스쳐 지나갔고, 공간만 남았다고.
국수를 사러 가는 장면이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도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단순히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장만옥이 국수 통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얼마 후 양조위가 같은 계단에서 내려옵니다. 그 사이 프레임 밖에서 두 사람은 분명 마주쳤을 텐데, 영화는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장만옥은 옷을 갈아입고 또 계단을 내려갑니다. 다른 날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가 옷 색깔입니다. 신과 신 사이에 설정 샷(establishing shot)을 넣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정 샷이란 관객에게 시간이나 장소가 바뀌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삽입하는 안내용 컷을 말하는데, 이 영화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생략합니다. 그래서 다른 날의 일이 같은 날처럼 겹쳐 보이고, 공간 속 시간이 파편처럼 쌓이는 느낌이 납니다.
이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다시 봤을 때, 앙코르와트 장면이 달리 보였습니다. 양조위가 사원 벽의 구멍에 입을 대고 뭔가를 봉인하는 장면에서, 저는 처음에 그냥 추억을 묻어두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보입니다만, 더 넓게 생각하면 그 벽에는 수백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이 이미 쌓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간은 유구하고, 그 속을 인간들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연출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점프 컷(jump cut): 2046호 방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계단 오르는 동작을 잘게 쪼개어 반복 편집합니다. 짧은 시간을 영원처럼 느끼게 만드는 효과입니다.
- 인물 교체 패턴: 특정 공간에 한 인물이 들어와 잠시 머물다 나가면, 같은 프레임 안으로 다른 인물이 들어옵니다. 공간이 인물들을 교대로 품는 구조입니다.
- 음악 배치: 메인 테마곡 〈Yumeji's Theme〉는 국수 사러 가는 장면에서 두 번째로 사용되는데, 그 시점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과 일치합니다.
연기 모티프, 그리고 장만옥이라는 존재
이 영화를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으로만 소비하면 절반도 못 보는 셈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핵심 서사는 두 주인공이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혼외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 상대 배우자의 역할을 연기해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 역할극(role-play) 구조, 즉 배우자의 행동을 재현하는 연기 모티프가 영화 전체에 걸쳐 총 네 번 반복됩니다.
첫 번째 연기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배우자들이 어떻게 처음 만났을지를 상상하며 재현합니다. 두 번째는 현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일본에서 배우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음식 주문 방식까지 끌어와서 연기합니다. 세 번째는 미래입니다. 남편에게 불륜 사실을 알고 있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미리 연습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결정적입니다. 더 이상 배우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두 사람 자신의 이별을 위한 연기가 됩니다.
이 네 번의 연기를 관통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부터가 진심인가. 첫 번째 연기에서 양조위가 장만옥의 손을 잡으며 "오늘 밤은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말한 그 순간, 그게 배우자를 연기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인지 영화는 결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택시 안에서 장만옥이 양조위에게 "오늘 밤 들어가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대사는 그 첫 번째 연기의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저는 주인공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장면에서 제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연기 모티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영화가 지우기 때문에, 관객도 어디서부터가 진심인지 헷갈리면서 영화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장만옥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치파오(旗袍)가 이렇게까지 매혹적인 옷인지 이 영화 전에는 몰랐거든요. 치파오란 여성의 신체 곡선을 따라 재단된 전통 중국 의상으로, 잘록한 허리와 골반 라인을 거의 그대로 드러냅니다. 영화에서 장만옥이 이 옷을 30벌 가까이 갈아입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신과 신 사이의 시간 변화를 알려주는 기능도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뒷모습 하나로 감정이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저 옷 입고 다니면 숨도 참아야 하고 자세 관리도 엄청나게 빡세겠다 싶긴 합니다. 그래도 그 아름다움은 인정합니다.
양조위의 눈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직접 다시 돌려보면서 느낀 건데, 그의 눈은 말을 합니다.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도 감정이 다 보입니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절반은 양조위의 눈빛이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감정 과잉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이 많은 것과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은 다릅니다. 화양연화는 감정을 절제하면서 오히려 더 많이 담아내는 방식을 씁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왕가위의 감각적 리얼리즘(sensory realism)은 감정의 직접적 표출보다 미장센(mise-en-scène)을 통한 간접 전달을 특징으로 한다고 분석합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되는 조명, 의상, 공간, 배우의 위치 등 시각적 요소 전체를 설계하는 영화적 개념으로, 이 영화의 경우 그 설계가 감정 그 자체를 대신합니다(출처: 영국영화협회 BFI).
두고두고 다시 볼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볼 때마다 다른 게 보이는 영화이고, 나이 들수록 다른 게 보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그냥 한 번 틀어두시길 권합니다. 설명 없이 봐도 충분히 아름답고, 알고 보면 그 이상입니다. 왓챠나 넷플릭스에서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