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진 사람의 기억을 통째로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한때 그러고 싶었습니다. 스물아홉을 보내고 서른을 앞둔 올해, 오랜만에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틀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이 울었습니다. 기억을 지우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부서지는지,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와 닿았습니다.
기억삭제, 실제로 작동하는가
일반적으로 기억을 지우면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제가 스물세 살에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기억 삭제라는 SF적 설정이 신기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게 얼마나 순진한 독해였는지 바로 보였습니다.
영화 속 라쿠나(Lacuna)사는 고통스러운 관계에 대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기술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선택적 기억 삭제란 특정 인물과 연결된 신경 회로망, 즉 뇌 속 기억의 연결 패턴을 표적 삭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지만, 이 설정이 가리키는 심리적 욕구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문제는 기억이 지워져도 두 사람이 다시 끌린다는 점입니다. 조엘은 기억이 삭제된 다음 날 아침, 자기도 이유를 모른 채 몬탁 해변으로 달려가 클레멘타인을 만납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화는 '컨텍스트(context)'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컨텍스트란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하며 쌓아온 감정의 맥락을 말하는데, 텍스트 즉 특정 말이나 행동 자체가 사라졌어도 그것을 둘러싼 맥락은 몸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처음 "나이스"라고 말했을 때, 그 단어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무게를 갖는지 조엘은 모르지만 그 무게감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절차 기억이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몸이 익힌 반응과 습관을 가리키는데, 명시적 기억이 지워져도 감정적·행동적 반응은 남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미국 심리학회(APA)). 영화가 과학적으로 정확하진 않지만, 이 직관은 꽤 정교한 셈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짚어볼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기억이 삭제돼도 감정의 맥락(컨텍스트)은 몸에 잔류한다
- 두 사람은 삭제 이후에도 동일한 장소, 동일한 상황에서 다시 이끌린다
- 조엘은 기억 삭제 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내면을 클레멘타인에게 고백한다
- 기억을 삭제했던 하워드와 메리 커플도 동일한 구조로 재회와 파국을 반복한다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은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의도적으로 뒤틀어 놓았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흐르고 기억 삭제 과정은 역방향으로 흐르는 이중 구조를 취합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 스토리가 헷갈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고, 이번에 다시 보면서 그 구조를 의식하며 따라가니 오히려 더 감정적으로 무너졌습니다.
반복과 오케이,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정체
서른을 앞두고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가장 다르게 느껴진 건 엔딩이었습니다. 스물세 살에는 "오케이"라는 마지막 대사가 그냥 예쁜 결말처럼 들렸습니다. 이번엔 그 한 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처럼 들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 영화의 엔딩은 재결합 자체가 해피엔딩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을 해피엔딩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테이프를 통해 서로가 상대를 얼마나 견디기 힘들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듣고 난 직후에 "오케이"를 말합니다. 그것이 포인트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을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이 명제를 사랑에 적용합니다. 기억에서 어두운 부분만 발라내고 밝은 부분만 남기는 것, 그것은 그 사랑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영화 속 라쿠나사의 서비스가 결국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은 18세기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시에서 가져온 구절입니다. 원래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로, "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spotless mind란 상처도 갈등도 없는, 즉 기억을 지워버린 깨끗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구절이 "모든 소망을 내려놓았구나"입니다. 흠 없는 평화를 얻으려면 모든 욕망과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이 제목 안에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이번에 처음 제대로 이해했는데, 그러고 나서 엔딩을 다시 떠올리니 눈물이 다시 났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신디 하잔의 연구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의 유효 기간은 평균 2~3년으로 제한된다고 합니다(출처: 코넬대학교 심리학과). 영화 속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도 정확히 2년 후 파국을 맞습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닌 것은, 이 영화가 사랑의 낭만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구조적 속성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번에 다시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장면은 기억 삭제가 진행될수록 조엘이 더 울부짖는 장면이었습니다. 최근의 불쾌한 기억부터 삭제되다 보니, 지워질수록 더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조엘의 모습에서, 암 환자가 마지막 단계에서 부정에서 인정으로 넘어갈 때처럼 참기 어려운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전까지는 가슴만 졸이다가 "enjoy it"이라는 한마디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서른을 눈앞에 두고 이 영화를 보고 나오니 땅에서 족히 1미터는 가라앉은 기분이었습니다. 기억을 포맷하고 다시 시작하면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영화는 그 믿음이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생기고야 마는 감정의 부산물, 그 처치 곤란한 찌꺼기들 때문에 지나간 사람들이 특별해지는 거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남았습니다.
4K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다면, 한 번쯤 가보시길 권합니다. 스물세 살에 봤던 분도, 지금 처음 보는 분도, 아마 다른 장면에서 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