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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무성영화, 올드할리우드, 데이미언차젤)

by 주.만.지 2026. 6. 9.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바빌론이 그냥 '라라랜드 감독이 만든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카데미에서도 외면받았고, 흥행도 기대에 못 미쳤다는 이야기만 들려왔으니까요.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게 왜 외면받았는지 아직도 의아합니다.

무성영화 시대가 배경인 이유, 그냥 복고 취향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화려하고 낭만적인 황금기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건 전혀 달랐습니다. 감독이 굳이 이 시대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성영화(Silent Film)란 대사 없이 배우의 표정과 몸짓, 자막 카드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던 초기 영화 형식을 말합니다. 기술적 한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극도로 순수한 시각 예술의 형태이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그레타 가르보나 발렌티노의 클로즈업을 '거의 천사 같다'고 표현한 게 괜한 말이 아닙니다. 저도 무성영화를 즐겨 보는 편인데, 그 시대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와 눈빛 연기에는 지금 영화와 다른 종류의 마법이 있습니다.

영화가 집중하는 건 사운드로의 전환, 즉 유성영화(Talkie)가 들어오기 직전 시기입니다. 여기서 유성영화 전환이란 단순히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었습니다. 도덕률 강화, 제작 시스템 산업화, 배우들의 생사여탈이 뒤바뀌는 대격변이었습니다. 이 격변기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바빌론은 단순한 복고 영화가 아닌 거라고 저는 봅니다.

이 시대 할리우드의 제작 환경을 실제 기록과 비교해보면 영화가 얼마나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스튜디오들은 한 주에 수십 편의 단편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배우와 스태프에 대한 노동 보호 규정이 전무했습니다(출처: 미국영화협회(MPA)). 영화 속 세트장에서 사람이 죽어도 계속 촬영하는 장면은 과장이 아니라 기록된 현실에 가깝습니다.

캐스팅이 가진 메타적 구조, 스타가 스타를 연기한다는 것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캐스팅 자체가 하나의 메타 서사(Meta Narrative)라는 점입니다. 메타 서사란 이야기가 자기 자신을 소재로 삼거나,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브래드 피트는 오래된 스타가 사양길에 접어드는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마고 로비는 이제 막 스타가 되어가는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그리고 디에고 칼바는 이 세계의 완전한 이방인인 매니를 연기하는데, 실제 촬영 당시 그도 사실상 할리우드 신인이었습니다. 영화 속 매니가 처음으로 영화 촬영장에 발을 딛는 장면이 디에고 칼바가 실제로 미국 스튜디오 촬영장에 처음 간 날이었다고 하니, 예술이 삶을 모방한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예술의 일부가 된 셈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마고 로비 장면에서 특히 놀란 건 재기를 위해 파티에 갔다가 보여주는 그 광기였습니다. 디카프리오가 다른 영화에서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 결의 에너지라고 느꼈는데, 그게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캐릭터의 절박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고 로비가 이 영화에서 이렇게까지 매력적으로 보인 건 처음이었습니다.

영화가 올드 할리우드를 찬사와 조롱 사이 어딘가에서 바라본다는 느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롱 쪽이 조금 더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빛나는 스크린 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식이, 할리우드가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온 아름다운 신화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처럼 읽혔습니다.

바빌론이 자기 참조 영화(Self-Referential Film)로서 가진 구조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실제 스타가 스타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림
  • 신인 배우 디에고 칼바를 통해 관객이 이 세계의 이방인으로 진입하게 유도
  •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실존 작품을 직접 인용해 역사 수정의 역설을 보여줌
  • 파티 장면마다 시대적 계층 구조의 변화를 시각화

라라랜드와 비교해야 비로소 이 영화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데이미언 차젤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라라랜드가 꼽힙니다. 그래서 바빌론도 비슷한 결의 영화일 거라고 예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라라랜드가 꿈과 현실의 충돌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방식이라면, 바빌론은 그 과정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납니다. 반면 라라랜드는 비극적 결말을 가졌지만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두 영화는 같은 감독이 만들었지만 정서적으로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란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치는 감정적, 구조적 흐름을 말합니다. 바빌론의 내러티브 아크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다가 결국 붕괴로 수렴합니다. 세 캐릭터 모두 올라갔다가 떨어지고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는 구조인데, 그 반복 자체가 할리우드라는 기계의 속성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러닝타임이 긴 편인데 저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초반의 강렬한 파티 시퀀스가 관객을 완전히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미쳐본 사람이 아니면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는데, 특히 마고 로비가 캐스팅 직후 밖으로 나오는 그 짧은 장면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같은 것들이 저에게는 오래 남았습니다.

미국 영화 비평 아카이브인 로튼 토마토 기준으로 바빌론의 평론가 점수는 55% 수준이었지만 관객 점수는 80%를 넘겼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이 격차 자체가 이 영화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비평적으로 소화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본 사람들의 체감은 다릅니다.

다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 영화는 라라랜드의 퇴폐적인 19금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이런 장면에 불편함을 느끼는 분이라면 미리 알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결국 바빌론은 할리우드를 사랑하면서도 그 안의 더러움을 가감 없이 직시하려 했던 영화입니다. 그 균형이 어떤 관객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을 수 있고, 그게 아카데미의 외면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10년 후에 재평가받을 작품이라고 봅니다. 시네마천국처럼 영화 자체에 대한 사랑을 담은 영화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더 선명하게 빛나게 됩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초반 30분만 버텨보시길 권합니다. 그 이후는 알아서 빠져들게 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47r1i_Y8m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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